- 먼저 쉼터에 도착한 나는 담벼락에 정갈한 글씨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낙서에게 시선을 빼았겼다. '낙서금지' 라는 붉은 거칠게 쓰인 위험한 글자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많은 아이들의 손을 거쳐간 낙서들이 회색의 공백을 채웠지만 이상하게도 그 중에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 건 하나였다. 「김민규가 부승관 때문에 무슨짓 까지 했는지 궁금 하신분?」 각 맞는 폰트 같은 글씨는 수많은 낙서들 중 유독 이목을 끌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아마, 김민규 부승관 이름이 등장한 이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낙서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그 의미심장한 문장을. “김민규가 부승관 때문에 무슨 짓 까지 했는지 궁금 하신분?” 낙서가 목소리 형태로 변..
나는 부승관이 나를 나와 유사한 감정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한 번도 녀석에게 직접적으로 내 감정을 이야기 한 적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녀석이 내 마음을 에둘러 짐작하고 섣불리 거절의 표현을 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녀석이 나를 대하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었다. 물론 애초에 고백할 감정은 아니었으니, 깊은 곳에 묵혀두고 다시는 외부에 꺼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금으로서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한 가지였으니까. 부승관이 행복해 지는 것. 난 녀석이 가지고 있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하루라도 지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그 계기가 굳이 나를 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라도 녀석이 치유받기를 원했다. 나는 내가 이 학교에 남아 있는 동안 부승관의 변..
처음에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김민규와 그 부승관인데,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합 두 명이 저런 개도 안 주워 먹을 헛소문에 연류 됐다는 게 어이 없을 뿐이었다. 저런 소문은 어디서 부터 뿌리를 내렸을까. 내가 어쩐지 심란한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소문의 당사자인 부승관은 평소와는 다르게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며 누가 낙서를 하고 다녔는지 캐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도 그 소문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아 달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부탁 하기까지 했다. 그저 한 번 욕하고 넘어가면 될 줄 알았던 저 찝찝한 소문이, 제법 단단해져 가고 있는 부승관을 찌르는 의표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헛소문일 게 뻔하니, 괜히 남의 입 빌려 이야기 듣는 것도 꺼려..
아, 나 형이랑 같은 학교 가는데 알고 있어요? 만나자 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을 꺼내는 부승관을 그냥 대꾸없이 쳐다 보았다. 혈색 없는 얼굴이 그간 부승관이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차마 내 마음가는 대로 쉬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 걸러서 입 밖에 나온 말이 이런 보잘것 없는 대답이었다. 부승관은 표정없이 쭈그려 앉아 있었던 다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허공에 대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나는 불안하게 서있는 부승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또 다시 입에 본드라도 붙인 듯 벌려지지 않았다. 지금은 11월. 간만에 보는 부승관은 그 전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오히려 그 전보다 더 의연해보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도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부승관이랑 키스했다고요?” “일방적으로 내가 밀어 붙인거지.” 최승철 선배는 나와 함께 걸으면서 무덤덤하게 자신과 부승관에게 있었던 과거를 내게 털어 놓았다. 세세한 것 하나까지도, 과거의 자신이 부승관에게 느꼈던 감정 하나 하나까지도. 어느것 하나 숨김이 없고 과감했다. 과장하는 것도 없이, 방어하거나, 자신을 포장하는 것도 없이 모든 걸 소신있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말 없이 그 긴 이야기를 경청 하면서, 이 선배가 지나왔던 부승관과 얽혀있는 과거가 놀랍도록 지금의 나와 유사한 양상으로 흘러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부승관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도출한 과정도 엇비슷 했다. 게다가 한성지에 대한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불합리적인 의심을 품게 된 것도 소름끼치릴 만큼 똑같았..
"야, 너랑 친한 그 후배놈 있잖아." "누구." '부승관." "……어." 걔 진짜 뭐라도 될 건가 보다? 진짜 허구한 날 쌈질하고 다닌다고 소문 자자하던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가벼운 표정으로 말을 던지는 친구 녀석을 흘끔 쳐다 보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주먹에 자연스레 힘이 잔뜩 들어가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고 있는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을 남의 입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취급되는건, 씁쓸하다. 나는 울컥 치미는 짜증을 토로 하는 대신, 내 쪽으로 불어 오는 찬 바람을 그대로 쐬며 눈을 천천히 감는걸 택했다. 싸늘한 바람이 자꾸만 얼굴을 감싸쥐고 아리게 했다. 쥐었던 주먹을 풀고 차가워진 손을 패딩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부승관과 알게 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 나는 졸업을 앞둔 3학년..
한성지는 유명했다. 아니, 유명했다는 단순한 표현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지는 않을까? 왼손으로 느긋하게 쥐고 있던 검은 휴대폰 액정 화면에 불빛이 들어 오기 시작했다. 잠금을 푸는 내 손이 절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성지?니네 학교에 그 졸라예쁜애?」 답장이 오기만을 끈기 있게 기다린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시덥잖은 글자가 액정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절로 맥이 탁 풀렸다. 졸라 예쁜애. 나는 어제도, 그저께도, 3일전에도, 일주일 전에도 각자 다른 사람 입에서도 숱하게 나온, 그 지긋하고도 단물 빠진 수식어를 오늘도 씹었다. 내가 이때까지 들은 한성지에 대한 이야기라고는 졸라 예쁜애 혹은, 졸라 예쁜데 졸라 착하기 까지 한 애. 고작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 한 사람의 평판이 이렇게 단순하고 깔끔하게..
: 짧은 순간이 뇌리에 고정값으로 박힐 때가 있다. 기억 해내려고 굳이 악을 쓰지 않아도, 머리를 싸매며 그게 뭐였더라, 기억의 딜레마에 빠져 스스로를 고문하지 않아도, 마치 어제 일 처럼 선연히 그려지는. 그때의 날씨, 분위기, 나 홀로 느꼈던 감정… 제 3자가 선명한 컬러 사진으로 찍고, 예쁘게 인화까지 해서 잊지 말라고 내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시킨 양, 내가 떠올리고 싶을때면 그게 언제가 됐더라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순간이 내게는 존재한다. - 중학교 2학년, 3월 중순이었다. 그날은 꽃샘추위에 더불어 살이 에릴 정도로 칼바람이 부는 이른 봄의 아침이었고, 제법 굵직 굵직한 비까지 추적 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 날씨의 악조건이라면, 평소의 나는 두 말도, 고민도 할 필요 없이 학교에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