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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쉼터에 도착한 나는 담벼락에 정갈한 글씨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낙서에게 시선을 빼았겼다. '낙서금지' 라는 붉은 거칠게 쓰인 위험한 글자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많은 아이들의 손을 거쳐간 낙서들이 회색의 공백을 채웠지만 이상하게도 그 중에서 유난히 시선을 끄는 건 하나였다.

 

「김민규가 부승관 때문에 무슨짓 까지 했는지 궁금 하신분?」

 

각 맞는 폰트 같은 글씨는 수많은 낙서들 중 유독 이목을 끌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아마, 김민규 부승관 이름이 등장한 이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낙서를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그 의미심장한 문장을.

 


“김민규가 부승관 때문에 무슨 짓 까지 했는지 궁금 하신분?”

 


낙서가 목소리 형태로 변화하여 내 귓속에 꽂혔다. 나는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 한 꺼번에 다 뱉고 난 뒤에야 뒤돌았다. 어느새 나타난 한성지가 웃으면서 내 옆으로 걸어왔다.


“네가 한거야?”


주어 없이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음에도, 한성지는 별다른 반응없이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싱거운 대답을 했다. 아뇨, 제가 안했는데. 거짓말일 게 뻔한 그 말이 마치 진실처럼 포장되어 한성지의 입에서 대수롭지 않게 술술 흘러 나왔다. 너 말고 이런 짓할 사람이 누가 있는데?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감정을 억누른 채로 되물으려다가, 더이상 이런 걸로 시간낭비를 하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한성지와 대화를 하면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이 무언지 알 수 있다. 진짜 사람에게 사람에게 주체성을 잃을 정도로 말려 들어 간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대화를 시작하기 전장부터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져서 거북할 정도였다. 비록 오늘도 마치 소환귀 같은 한성지를 대뜸없이 불러 낸 건 나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한성지가 잡고 있다. 내가 모르는 범위까지 모든 걸 궤뚫고 있는 건, 오로지 한성지라는 인물 한 명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 지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느라 한성지를 앞에 세워 두고 뻑뻑 마른 담배만 피워댔다. 마치 루브르 미술관에서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위대한 미술작품을 몸소 감상하고 있는 듯, 황홀경에 빠져 낙서들을 찬찬히, 다정스레 바라 보던 한성지가 고개를 휙, 내 쪽으로 돌렸다. 마주한 드문하게 장난기 섞인 말간 미소는 아직 중학생 처럼 보였고, 앳된 티를 채 벗지 못했으나 역시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또 예전과 다르게 어딘가 처연한 구석도 생겨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거리낌이 들었다. 나는 나도 피우던 담배를 손에서 놓치며 말했다.


“너, 변했다.”


나는 한성지의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2년, 아니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으니 절대 불변할 것 같은 한성지도 무언가 변화는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예상한 항로를 벗어나있어서 나는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좋은 의미의 변화는 아니었다. 지금 내 눈 앞의 한성지는 예전만큼 혀를 내두를 정도로 모든 장르를 넘나 드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말투, 눈빛과 같이 전체적인 사람의 외적 분위기를 주도 하는 것들은 다행히 아직 원래의 빛을 바래지 않고 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면에서 부터 완전히 그 혈기가 시들어진 느낌이었다. 버석하게 말라버린 길거리의 이름 모를 꽃잎처럼, 손을 대기만 해도 그대로 꺼끄러기가 되어 처참하게 부스러져 버릴 것만 같다. 처음으로 한성지 근황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 왔길래 그토록 위풍당당하던 한성지가 이렇거 변했을까에 대한, 무엇이 한성지를 변하게 했는지에 대한.


“뭐가 변한걸까요? 저는 제가 딱히 변했다고 생각해본적은 없는데요.”


한성지의 화법은 언뜻 보기에는 정중하다. 저 나이대 답지 않게 70-80년대 부잣집 사람들이 주로 쓸 법한 사근사근한 표준어 말씨와 우아한 억양을 사용하지만, 그 말 속에는 불특정다수를 향한 공격성이 깔려 있다. 한 손으로 다른 쪽 손목을 가볍게 쥔 채, 담 근처를 오다니는 한성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체 왜 전학 온거야?”
“이제 그냥 내가 여기 온 것 만으로도 불만인가봐요, 오빠.”
“…네 수작 나한테는 안 통한다는 거 알잖아.”


한성지는 멈춰서서 빙긋 웃었다.
나는 홀로 점점 감정이 격양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할 수는 없어?”

“……”
“넌 대체, 부승관을 얼마나 더 바닥까지 처 박아야 만족할건데?”


이런 이야기를 한성지한테 직접적으로 내뱉은 건 처음이었다. 한성지는 고심에 묻혀서 몇 년간 방치 되다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내 말을 뒤로한 채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오빠한테만 뭐 하나 알려드릴게요. 예전일인데.”

 

한성지는 뒤돌아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제가 승관이랑 만나기 전에 승관이가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대요. 이름이 진아였나? 걔는 학교도 안 다니고, 엄청 가난한 애였는데 우연한 기회로 친해졌다나봐요. 그렇게 서로 알게 되면서 승관이는 그 진아라는 애가 너무 좋아진 거야. 그래서 매일 같이 만나서 같이 놀았대요. 뭐 그냥 둘이 좋은 친구로 지내면서 행복했으면 끝날 이야기였겠죠? 근데 현실은 안 그래요. 요즘은 어린애들이 제일 무서운 거 알아요? 진짜 무서워. 악의 없이 사람을 괴롭히거든. 승관이랑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들이 승관이가 학교도 안다니고, 가난한 여자애랑 어울리는 걸 보고 승관이를 따돌린거예요. 왜 그런 애랑 노냐고, 너도 그렇게 되고 싶냐고 반협박식으로. 그걸 들은 승관이의 반응이 상상이 가세요? 오빠는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승관이는 엄청 겁이 많았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자기도 겁이 난거지요. 왕따가 될까봐.

그래서 진아를 일부러 피해다녔대요. 맨날 같이 모여서 놀던 애를 쓸모 없는 짐짝 버리듯, 그냥 쉽게 버린거죠. 근데 그 남자애들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않아. 진아를 표적으로 물리적으로 괴롭힌거야. 때리고, 욕하고. 아무리 초등학생들 싸움이라지만 힘차이가 있잖아요. 걔네는 그 진아라는 애를 정말 못살게 괴롭혔대요. 근데 정작 승관이는, 몰랐대요. 그걸.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진아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고 부상을 당해서 크게 다치게 된 뒤에야 알게 됐대요. 그 꼬맹이가 옥상에서 미쳤다고 자기가 몸을 던졌겠어요? 누가 밀어 버린 거지. 그럼 진아를 옥상 에서 민 건 누구겠어요? 당연히 진아를 계속 괴롭히던 쓰레기같은 새끼들.

진아는 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고 이사를 가버리고, 그 이후에 승관이 앞에서 자취를 감췄대요. 그럼 이 사건 이후에 남은 건 뭘까요? 오빠, 한 번 맞춰봐요.


왜 대답을 못해요? 모르겠어요?

승관이는 마음이 너무 약하고, 무슨 일이 발생하면 다 자기 탓으로 받아들여요. 따지고 보면 진아가 괴롭힘 당해서 이사를 간 게 오롯이 승관이의 잘못일까요? 아니, 처음부터 괴롭힌 애들 잘못이지요. 근데 승관이는 절대 그런 걸 생각 못 해. 물론 애들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는 비겁한 짓이지만, 그건 그 나이대 애들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행위인데, 스스로를 도망친 겁쟁이로 생각하고 못견뎌 한 거예요.

승관이는 자기에 대한 도덕적인 잣대가 굉장히 높거든요. 그런 아이한테 이런 오명이 새겨지면 어떻겠어요? 그냥 매 순간이 지옥이에요. 나는 전학오자마자 승관이의 그 어두운 면을 눈치챘죠. 오빠 이쯤 되면 알잖아요. 내가 사람 잘 보고 잘 갖고 노는 거. 승관이한테 먼저 접근 했는데, 너무 잘 넘어오는거야. 내가 진아랑 닮은 이미지라 더 잘 어필이 됐겠죠. 순진한 승관이는 그때의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한테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고해성사까지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궁금했어요. 대체 얘가 가지고 있는 진아에 대한 죄의식의 깊이는 어느정도 까지 일까? 그래서, 실험해본거죠. 그래서 내가 진아인 것 마냥 투영해서 보고 모든 걸 쏟아 낸 승관이를 제 욕구 대로 가지고 놀았어요.

지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진아고 뭐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모든 걸 떨쳐내고 싶은 욕망에 포기 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그래서 싸움을 하게하고, 정말 감정을 극한까지 몰아 넣고, 여자친구 행사 하며 싸움으로 난잡한 곳으로 팔아 먹고, 얘가 내 말에 어디까지 순응 하는 지를 실험했어요. 그 과정이 재미있었냐고요? 물론 재미있었죠. 내가 못하는 일들을 승관이가 대신 해주는 게 얼마나 행복했다고요. 승관이가 지쳐서 포기하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승관이는 지쳐해도 내 말에는 무조건 복종하더라고요. 그만큼 죄책감이 컸다는 증거겠죠.


“……왜?”


나는 내 앞으로 쏟아지는 말들을 조금씩 소화시키며, 입을 열어 겨우 말을 꺼냈다. 지금으로서는 왜라는 질문 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한성지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받아 들이기는 힘들었다. 냉정한 한성지의 입에 나오는 모든 말들은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정말 가려졌던 진실인지도 모른다. 그 말대로 승관이의 인생에 오점인 진아라는 아이가 존재했고,  승관이가 그로인한 트라우마에 집착해서 한성지 곁을 떠나지 못한 거라면, 그럼 한성지 너는 대체 왜 고작 호기심 하나로 부승관을 실험대상으로 만들고 유흥거리 취급한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비인간 적인 짓을 아무렇지않게 저지르고, 심지어 행복함까지 느꼈다는 게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인건지. 물론 내가 생각한 한성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지만, 부승관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과거와 그 무거운 죄책감을 가지고, 그저흥미 위주로 갖고 놀았다는 건 그냥 타인의 시각으로 봐도 너무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부승관에게서 느껴졌던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트라우마 속에서 끝없이 몸부림 치고 있었던 것이다. 진아라는 아이와, 한성지. 미련했던 과거로 회귀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늪에서. 나는 분노와 밀려오는 슬픔으로 말 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성지는 그런 나를 묵묵하게 쳐다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승관이를 놔주려고 했어요.”
“씨발, 지랄하ㅈ….”
“오빠.”


한성지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마법이라도 걸린 듯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전 지루한 거 싫어해요. 처음부터 전 승관이가 나한테서 도망치기를, 그냥 죄책감이고, 진아고 다 포기하기를 바랬던 입장이었어요. 왜냐면, 저 아무리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계속 가지고 놀면 질릴테니까요. 나한테 승관이가 질리는 순간은 처음부터 존재 했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난 꽤 오래전부터 그랬다고요. 하지만 승관이는 내 앞에서 끝까지 도망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냥 승관이한테서 발을 빼기로 결심 했어요. 이미 난 빠르게 승관이한테 질렸었거든요. 내 말을 지고 지순하게 다 반항없이 듣는 건 지루했어요. 도망칠 궁리조차 없이 모든 현실을 순응하는 게 짜증났어요. 그게 언젠지 알아요? 중학교 1학년 때 부터요. 난 이미 그때부터 관이한테 질려 있었어요.”
“……”
“그 이후엔 승관이가 어떻게 되든 나는 승관이를 버리려고 했죠. 오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난데 없는 타이밍에 한성지의 입에서 거론된 나의 존재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소 어이없고도, 불편한 전개가 이어질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대화를 하면서도 한성지는 조금씩 여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빨라져 가는 말의 속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오빠 좋아했던 건 알고 있었잖아요. 알고 있었으니까 오빠가 날 그렇게 취급했겠죠? 난 오빠가 왜 그렇게 나를 매몰차게 대하는 지 처음부터 알았어요. 내 옆에 있는 승관이 때문이라는 거. 승관이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주종의 냄새를 맡고 꺼려졌는지도 모르죠. 오빤 그런 거 잘 알아 차릴 테니까. 하지만 그것뿐은 아니었잖아요. 오빠는 승관이를 좋아했고, 그 옆에 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었죠. 아주 구역질 나는 질투심이었어요. 그 질투심으로 인해, 승관이 옆에 있는 나를 무시했죠. 그 모멸을 고스란히 받은 난 무슨 기분이었을것 같아요? 아주 더러웠지. 내가 처음으로, 내 인생 처음으로 이성적인 호감을 가진 상대한테 그렇게 구린 취급을 받은 것도 짜증나는데, 그 상대가 내가 아닌 내 장난감을 호시탐탐 노리고있다. 그럼 그걸 내 성격에 괘씸해서 어떻게 보고 있겠어요?”
“너 지금,”
“말 끊지 마요, 오빠. 아직 안 끝났어요.”


한성지는 쥐고 있던 자신의 손목을 더욱 그러쥐며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단호하게 제어하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너는 이 모든 상황을 네게 관심을 주지 않은 내 탓으로 몰고 가냐고 무어라 반박의 말들이 입밖으로 쏟아져 나오려 했지만 한성지의 말이 주문이라도 된 듯 입안에서만 빙빙 소리없이 돌았다.


“그래서 난 승관이를 버리겠다는 마음을 도로 다시 접었어요. 난 오빠가 나와 승관이의 관계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계속 여지를 남기려고요. 오빠에게 한 올의 관심조차 줄 여유가 없는 승관이의 모습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오빠가 오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길 바랬어요. 이 모든 게 거짓말 같죠? 오빠는 몰랐을거예요. 오빠가 보이는 그 적대심이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고, 결국은 그 비수가 다시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걸. 나는 내가 원하는 걸 가지기 위해서는 절다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오빠의  조바심 섞인 행동들을 멀리서 지켜 보는 건 정말이지,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어요.

하지만 우습게도 그것 역시도 오빠가 졸업하고 난 뒤에 바로 흥미가 떨어지더군요. 그런데 그때 쯤에 또 다시 바톤을 이어 받고 나타난 거예요. 김민규가.


김민규, 참 재밌는 애였어요. 수려하게 생겼고, 항상 상위 포식자의 자리에 서 있었고, 어딜가나 한 번에 먹히는 막강한 권력도 가지고 있었죠. 사리판단이 빠르고 엄청 냉정한데, 또 애처럼 순수한 면도 공존했어요. 날 꾀어 내려고 무모하게 시도하고, 내게 헌신적인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준 것만 봐도 느낄 수 있었죠. 속는 셈 치고 짧게 만나려 지만, 점점 가면서 김민규한테 끌림을 느꼈던 건 사실이에요. 예전에 오빠를 보고 느꼈던 것처럼. 김민규가 어디서 나랑 승관이에 대한 찌라시만 물고 들어 오지 않았다면, 나는 김민규에게 정착했을 지도 몰라요.

민규믐 참 똑똑해요. 어떻게 보며 단순하고 바보 같지만, 똑똑하고 냉정해요. 나는 민규가 나와 승관이의 관계에 대해 캐물었을 때, 이제 우리 사이는 이렇게 종식 될 거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어요. 잠시 망각했던 현실을 보게 되었죠. 내가 승관이에게 행사하던 권력을 버리지 못한 와중에 민규가 뛰어 들었다는 것을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했어요. 승관이냐, 민규냐. 그건 꽤 어려운 난제 였죠. 그래서 나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또 나를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두 명을 싸워보게 하고 싶었거죠. 물리적으로. 그래서 둘을 같은 자리에 불렀어요. 그리고 싸워서 이기면 나를 갖게 해준다고 했죠. 거기서 난 내 인생 가장 큰 실수를 했어요. 김민규랑 승관이랑 만나게 한 거.”


다시 소름끼치는 적막이 감쌌다. 잠시 생각에 빠진듯 한성지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나는 한성지의 가면이 조금씩 벗겨져 간다고 느낄 수 있었지만 여유를 챙기지는 못했다. 그냥 글자로만 받아 들이고 흘려 보낼 수 없는 너무 많은 일들이 한성지의 입에서 자꾸만 튀어 나왔다. 나는 한성지가 다시 입을 닫고 그대로 돌아 가버릴까봐. 조용히 숨을 죽이며 어떤 리액션도 하지 않았다. 한성지는 벽 한 쪽면을 장식한 김민규와 부승관을 향한 낙서에 다시 여운있는 시선을 남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난 내가 승관이한테 있어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정복자 이고, 항상 우위에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궁지로 내모는 건 항상 승관이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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