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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

그게 그대의 가장 용서받지 못할 점이다.


-차라투스트라  



-


  

, 내가 메인인거 알지. 나오기 전 까지는 그 새끼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마라. 피죽 돼있으면 니들이 대신 뒤진다. 아직 안 왔지?”

-. 아직 안 옴. 너는 언제 오는데?

니네들이 힘 좀 빼놓으면. 쫌 기다리고 있어봐. 지금은 오장효 먼저 조지고. 일단 끊는다.”

 

통화는 종료됐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을 우겨 넣으며 손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당겼다. , 지금 시간은 오후 347. 속 안으로 전해지는 매캐한 연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모처럼 착용하고 온 손목시계의 작은 바늘을 덤덤하게 보았다. 정확히 50분에 저 안으로 들어 갈 것이다. 생각을 바로 잡으며 고개를 뒤로 흘끔 돌렸다.

 

'바른중학교 제 1체육관'

 

관리의 자취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허연 먼지로 뒤싸인 노쇠해진 나무 명판 속 진한 궁서체의 글씨를 읽었다. 싸움하기 딱 좋은 장소네. 이토록 나에게 최적의 장소를 가지고 있는 바른중에게 잠시나마 부러움이 일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유쾌한 마음으로 방문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금세 자연소멸됐다. 나는 짧아진 담배 꽁초를 발로 짓이기며 눅눅한 공기가 가득한 공기를 들이 마셨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아직 저녁도 아닌데 하늘에는 어두컴컴한 타래 같은 구름들이 잔뜩 엉겨 있는 것이,마 꼭 금방이라도 비가 억수 같이 쏟아 질 것만 같았다. 날도 참 거지같은 날로 잡아가지고... 나중에 내가 저 곳에서 나올때, 제발 비는 내리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분명 어제 부승관에게 내가 은연 중에 숨기고 있었을 모든 걸 내보이고 붙잡았을 터이다. 하지만 부승관은 역시나 내게 잡히지 않았다. 내게 동요하며 흔들릴 찰나의 순간을 기대하고 꼭 움켜쥐려 했던 내 손바닥 안을 결국 유유히 빠져 나갔다. 내게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똑 지같은 어중간하고 애매한 감정을 안개처럼 흩뿌리며.

 

아마도 내 인생 처음일 시련을 고스란히 안겨 받고,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부승관에게 주는 파급력은 미미하게나마도 없었다는 것, 지금 내가 녀석을 반 쯤 죽이는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 이상은, 절대 내 쪽으로 끌어 당기지 못한다는 것. 이 모든 사실을 사실 그 자체로 받아 들이고, 수긍하는 것은 인생의 주체 노릇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아왔던 내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인정 하는 순간 그 무기력함에 내가 감내 하지 못할 자기혐오감과 싸우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부딪혀 본 적 없는 큰 시멘트 벽을 상대로 헤딩한 기분이다.

 

나는 집에 들어와 불 꺼진 방안에서 가만히 앉아 조용히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말도 형용하지 못할 모든 감정들을 끌어 안고. 계속 생각을 이어 가다보니, 초장에 큰 충격을 흡수하고 내 이성적인 판단을 흐려 놓았던 분노,열분, 여러 복합적인 음울한 감정들이 차츰 사라져 가는 듯 했다. 제법 온전하고 차분 해진 마음을 다스리며 아직 잔류되어 있는, 아마도 내가 해야 할 미해결 과제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를 노린 듯 잠잠하던 휴대폰이 짧게 한 번 울렸다.

 

[내일 4시에 바른중학교 1체육관에서 싸운대. 구경갈거임?]

 

나는 덤덤하게 문자를 읽어 내렸다. 방금 좀 그럴듯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걸 과연 실행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럴듯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실 너무나도 간단한 방법인데, 냉정하게 보면 위험한 발상이고, 부승관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평생 증오와 미움을 받아야 할 각오까지 감수 해야 하는 위험부담 있다. 하지만...

 

나는 부승관을 싸우게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 그 다 죽어가는 몸상태가 괜찮아 지기 전까지는. 아마도 난 부승관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이미 몇 번이고 상기한 나로서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구경은 안 해.]

 

싫어 하는 짓만 해서 미안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내가 부리는 마지막 오지랖이다.

 

 

-

 

 

'야 오늘 나 부승관이랑 짱뜰건데 협조 좀.'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좀 논다 하는 애들은 다 몰려 있는 단톡방에 모처럼 톡을 띄웠다. 내 파격적인 선언에 이른 아침부터 톡방은 난리가 났다. 광라리랑은 갑자기 왜 싸우냐, 광라리 오늘 오장효랑 뜨기로 했는데 어떻게 된거냐, 아닌 아침 중에 바른중이 웬 말이냐, 한성지 때문에 바른중에 악감정이 남았냐 온갖 헛소리들이 나 좀 봐달라 아우성 치며 앞 다투어 올라오는 가운데에 다시 나는 내 결심을 올렸다.

 

'오늘 내가 오장효랑 부승관 둘 다 조질거임.'

 

 

한성지가 부승관을 위해 짜놓은 판에 내가 대신 들어 가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냥 부승관이 갈 장소에 내가 가서 먼저 오장효를 조져 버리면 되니까. 다만 방해요소가 있다면, 역시 부승관 당사자 이다. 부승관을 체육관 까지 못 오게 막아야 하는 건 필요불가결 하다. 부승관vsvs오장효 거기다가 한성지 까지 더 해지면 무슨 눈 뜨고 못 볼 사단이 급전개 될지 눈 감고도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애들 쫌 모아서 바른중 정문 앞에서 부승관이 체육관으로 오지 못하도록 적당히 막아 달라 지시 한 것이다. 그 틈에 내가 체육관에 들어가서 오장효를 첫 빠따로 조지고, 그 이후에는 부승관을 조지 겠다는 당찬 포부를 선 보였다. 이렇게 거들먹 거리지 않으면 애들을 이용해서 부승관을 체육관 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시간을 벌 수 없다. 왜 굳이 둘 싸움에 끼어서 네가 그 둘을 조지려고 하는 거냐는 핵심을 찌르는 물음에는, 중학교 졸업하기 전에 이 지역 최강 짱 자리는 한 번 찍고 졸업 하고 싶다는, 참으로 나 답고 허세 작렬 하는 말로 둘러 댔다. 그 말에 가슴 뜨거워 져서 돕겠다고 팔 걷고 나선 애새끼들 한테는 많이 미안하지만.

 

부승관이 아무리 싸움 좀 한다, 좀 날고 긴다 하더라도 그 몸 상태인데 앞에 있는 애들을 단 번에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애들이 좀 험악 해서 최근 많이 약해진 부승관을 거칠게 다룰까봐 그건 좀 염려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메인이다, 김민규가 메인이다, 너희는 쩌리일 뿐이다! 이 말을 엄청 주입식 교육 처럼 세뇌 시켰던 것이다. 그 말은 내가 메인이니 너희는 내가 오기 전 까지는 부승관을 다치게 하지마라. 정말 막기 위한 아주 최소한의 폭력만 사용해라, 이 뜻과 문맥상통한다. 부승관을 최대한 덜 다치게 하기 위해 벌린 일인데, 오장효랑 싸울 때 보다 더 심한 몸상태가 되어 버리면,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 시간인 4시 보다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체육관 근처에 숨어서 이 새끼들이 언제 오는지 지켜 보았다. 만약 오장효랑, 부승관이랑 같이 등장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최악의 흐름을 타 버리지만, 그때는 그냥 내가 막무가내 처들어가서 흘러 가는 상황 대로 본능적인 감각을 살려 응하면 된다.

 

그렇게 한 30분 쯤 기다렸을까, 덩치가 부승관의 두 배쯤 돼 보이는 놈 짧은 머리의 사내 한 명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팔자 걸음으로 의기양양 하게 걸어 오는게 보였다. 그 뒤에는 한 예닐곱쯤 되는 무리들이 뒤를 따랐다. 무슨 크로우즈제로 찍냐? 조폭 영화찍냐? 나와서 비꼬고 싶어질 정도로 온갖 가오를 잡는 모습들이 전달됐다. 저 덩치 큰 놈이 바로 오장효일 것이다. 소문에, 싸움도 잘 하고 그만큼 성격도 더럽기로 유명하다. 중학생 답지 않게 차갑고 냉정하고 거만하다. 싸워본 적 없는 상대라 나보다 싸움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 어림짐작 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숨을 죽이고 녀석들을 지켜 보았다. 체육관으로 들어 가는 무리 중 부승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안도 했지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저 비겁한 새끼는 애 한 명 잡으려고 7명 이나 데려오냐? 새끼들이 아무리 뇌갈 텅텅 이라지만 기본 예의는 좆에 달고 다니나. 너희는 혼모노로 아구창 다 털릴 준비해라.

 

나는 쓰고 온 모자를 더 푹 눌러 쓰며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오장효도 들어 왔고, 이제 애들한테 교문을 봉하는 중대한 임무를 위임할 시간이다. 문자를 찍으려다가, 무심코 기분 나쁜 낌새가 훅 들어와 앞을 쳐다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가벼운 발걸음으로 체육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한성지가 보였다. 나는 휴대폰을 감추고 한성지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내 쪽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았다. 발걸음 만큼이나 유독 가벼운 표정이 눈에 띄었다. 나는 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저 미친년. 온 세상이 떠나가라 육성으로 내뱉고 싶어진다. 나는 저 하얗고 말간 가면 위에 숨겨진 명백한 악의를 안다. 오늘 부승관을 싸우게 만든 것도 너란걸 안다. 네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부승관을 휘두르며 정복하며 무너져 가는걸 방관하며, 심지어 그걸 주도 하기 까지 하며, 남의 고통으로 희열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짓밟는걸 좋아한다고? 그럼 나도 짓밟혀줄게. 대신 너도 짓밟혀봐.

 

-

 

그리고, 지금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50분 이다. 애들은 체육관으로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정문을 막고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쪽 문제는 나름 해결 됐고. 지금 나는 저 체육관으로 딱 올라가서 싸움 준비를 끝낸 무리들과 대신 싸우면 된다. 나는 계단을 올라 가기 전에 잠시 멈춰서서 고민했다. 사람 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미끼 하나 깔아두고 갈까. 아까 처 박았던 휴대폰을 다시 꺼내어 혹시 몰라 저장 해두었던 번호를 찾아 문자메시지를 눌렀다.

 

[안녕 야 재밌는거 보여줄게 한가하면 너희학교 구체육관으로 와봐 나 지금부터는 답장못하니까 이거 보면 바로 ㄱㄱ]

 

오케이. 전송 버튼을 누른 후에 전원 버튼을 꺼 버리고 위를 쳐다 보았다. 높은 계단위에 체육관에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있었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구냐, .”

 

침침한 불빛이 흘러 나오는 체육관으로 망설임 없이 입장했다. 내 발소리에 다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일제히 뒤돌았고, 나를 보고 표정이 변했다. 하나 같이 ??누구?? 하는 표정이었다. 우두머리 아니랄까봐 가운데서 삐딱하게 서있던 오장효가 성난 눈썹을 위로 치켜뜨며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맞받아 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매트 하나를 깔고 다리를 세워 얌전히 앉아 있는 한성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한성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가 오는 걸 알고 있는것도 아니었을텐데, 지나치게 태연하고 동요 없는 얼굴이어서 열받았다. 한성지는 천천히 일어 나더니, 서 있는 시커먼 무리를 지나쳐 내 앞으로 다가왔다. 데자뷰다. 몇 달 전에도 이런적이 있었는데. 나 역시 무표정으로 한성지를 일관있게 쳐다 보았다. 한성지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웬일이야, 민규야.”

  “......”

네가 승관이 대신 온 거니?”

 

한성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마자, 웅성거림이 일었다. 뭐야 저 새끼가 정도중 김민규라고? 낯선 목소리가 배려없이 툭 꽂혔다. 그래도 나는 부딪힐 수 있다. 나는 한성지의 말에 담담한 목소리로 잔말없이 대꾸했다.

 

. ”

“...우와, 민규야.”

 

너 얼굴만 잘생긴 호구인 줄 알았는데, 똑똑하구나. 나긋한 한성지의 속삼임을 들었다.

 

야 뭐야, 한성지. 부승관이랑 뜨게 해준다며.”

민규가 승관이 대신왔대. ”

 

한성지는 손을 뻗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기쁜 척 하는 건지, 정말 기쁜건지 헷갈리는 표정이었다. 잡은 손을 대놓고 내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한성지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지금 내가 온 것과 부승관을 연관지어 생각 하면 곤란 했기 때문이었다. 부승관을 기대했던 오장효와 그 무리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와 한성지를 번갈아 쳐다 보고 있었다.

나는 성큼 성큼 오장효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딴 말 없이 바로 주먹으로 얼굴을 내리쳤다. 한 방에 바닥에 고꾸러진 녀석이 잠시간 그 자리에 앉아 있더니, 이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씨발새끼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귀청 떨어지겠네. 쓸데 없이 목소리는 커가지고. 나는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아직도 바닥에 앉아 있는 녀석을 걷어차고, 바로 위에 올라타서 주먹을 한 방 더 날렸다.

 

. 나라서 실망했냐? 너 나랑도 못 싸워봤잖아. ”

, 개새끼...”

질질거리는 좆만이 아니랄까봐 주둥이만 살아서 팔팔 거리네. 어딜 봐도 하등한 새끼 좆나 올려치기 하며 극진히 모시는거 보니 거기도 어진간히 인재 하나 없나봐. ”

 

오장효의 얼굴은 살색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붉어 지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밀쳐낸 오장효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일단 나로 화제를 돌리기는 성공한 것 같다. 어느 새 한 발 물러 서서 싸움을 방관 하고 있는 한성지가 보였다. 한성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한성지에게 한 눈이 팔린 그 틈으로 센 주먹이 내 얼굴을 가격 했다. 한 방이 두 방이 되고, 세 방이 되었다. 적당히 맞아 줬다 싶을때, 나는 허리를 숙여 주먹을 피하고 다시 배를 세게 걷어 찼다. , 소리가 났고, 녀석이 고꾸라졌다. 멱살을 거칠게 쥐어 올리고 다시 얼굴에 주먹을 수 대를 연속으로 날렸다. 그 큰 덩치로 끊임 없이 맹렬하게 반항 하며 나를 밀치려는 오장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뭐야. 내가 안와도 될 뻔 했다. 싸움 잘 한다더니... 아무리 지금 부승관이 아픈 상태여도 이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을텐데.

 

잠깐만, 민규야.”

 

다시 주먹을 내리 꽂으려는 순간 내 손을 저지 하는 강한 힘이 있었다. 나는 꽤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한성지였다. 내 주먹을 맞잡은 한성지는 입을 꾹 다문채, 고개를 좌우로 가로 저었다. 나는 좀 놀랐다. 그 전부터 느꼈지만, 한성지는 꽤 힘이 센 편 인것 같다. 속도감 있게 꽂히는 내 주먹을 이렇게 한 번에 저지할 정도면.

 

역시 민규야, 너는 안되겠다.”

“...뭐라고?”

이렇게 너만 일방적으로 싸우면 재미 없잖아. 나는 이런 걸 보고 싶은게 아닌데.”

 

우리 승관이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뒤에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깜깜하게 암전 됐다.

그래... 그랬구나,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불리한 판을 짜서 안 맞을 수 있는 애를 처 맞게 하고 다녔구나. 형용하지 못할 정도로 거세고, 자연스러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얼굴 근육이 덜덜 떨리는게 느껴질 정도의 분노감이었다.

 

지금 승관이가 너무 보고 싶어. 승관이는 왜 안 올까. 승관이는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해줬거든. 우리 착한 승관이... 민규야 승관이는 어디 간거야?”

 

한성지는 꿈 꾸는 듯한 얼굴로 부승관의 이름을 거듭 불렀다. 일부러 나를 떠보기 위해 저렇게 행동 하는거,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손쉽게 넘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오장효의 멱살을 잡고 있던 왼손에 힘이 탁 풀리고 말았다. 분노를 이기고 빠르게 머릿속을 장악하고 들어온 것은 어떻게든 한성지를 나로 만족하게 해야겠다는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지금 내가 오장효와 이 무리들을 다 쉽게 이겨버리면, 한성지는 당장 내일이라도 부승관에게 더 강도 높은 싸움 시나리오를 짜서 강압접으로 요구할 것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기까지 알게 된 나는 눈치 껏 행동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한성지에게 복종 하는 혐오 스러운 일도 마다 하지 않아야 했다. 이미 한성지는 필승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필승법에 굴복 할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게 틀림 없다. 그게 미치도록 열받았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건 그냥 부승관 하나로도 충분한데.

고단수인 한성지는 부승관을 이용해서 나를 더욱 피폐한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고의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과 말로.

 

자유롭게 몸이 놓아진 오장효는 내게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 나는 반항 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 주었다.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주먹이 곧바로 한 대 더 들어왔다. 싸움은 못하지만 막상 때리니까 아프긴 하다. 오장효는 거친 숨을 내쉬며 붉은 얼굴로 폭격처럼 내게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르다가, 번쩍 고개를 뒤로 돌려 다른 애들한테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이미 내 생각은 반쯤 다른 곳에 가있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뒤에 떨어져 있던 무리들의 발소리가 가깝게 느껴지는걸 보니 썩 좋은 이야기를 나눈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멍하니 바닥에 널부러져서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등 허리를 무자비 하게 가격하는 발길질들이 있었다. 물론 발은 오장효, 하나가 아니었다. 어디서 들어오는지도 짐작 가지 않는 수많은 발길질을 받았지만, 나는 전혀 반항 하지 않았다.

한성지가 원하는 건 이거다. 내가 짓밟히는 거.

 

이상하지. 네가 내 애인 행세를 하러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맞고 있는 와중에도 한성지의 나긋한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서, 귀를 틀어 막고 싶어졌다.

 

민규야.”

 

나는 감고 있던 눈을 희미하게 떴다. 흔들리는 시야에 잡힌 수많은 운동화 중에서도, 한성지의 운동화가 유독 위협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보였다.

 

대체 누가 우리 민규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걸까.”

 

...귀를 막고 싶다. 정말 악몽 같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변하게 했어?”

  

계속 떠 보는 것도 역겨워. 나를 걷어 차는 이 발길질 보다 한성지의 저 말들이 죽기 만큼 싫고, 증오스러웠다. 부승관은 이 고통을 몇 번 이나 느꼈을까. 대체 넌 한성지를 얼마나 좋아하길래 이런 비상식적인 짓을 하고 다니냐? 그리고 나는 너를 얼마나 좋아 하길래 이런 비상식적인 짓을 대신 해주고 있는 거야. 나는 눈을 감고 모든 고통과 수치스러움, 분노를 사그라뜨리며 부승관을 떠올렸다.

  첫만남에 내 앞에서 키스를 하던 모습도, 눈물을 흘렸던 모습도, 늘 짓고 있었던 뚱한 표정도, 그럼에도 항상 소년 같이 반짝 빛났던 눈동자도, 극히 어두운 명암 속에 박제 된듯한 우울하고 위험해 보였던 분위기도, 방어 하는 것 처럼 튀어 나왔던 예민하고 신경질스러웠던 말투도, 늘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 였던 하얀 얼굴도, 걸코 작지 않았던 손도, 마른 입술도, 정복욕을 끓어 오르게 하는 조금은 무기력하고 의욕없어 보이던 모습도...

 

가슴에 박히는건 다 아프고 처연한 녀석의 모습이다.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걸 가진 부승관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부승관 때문에...

 

나는 눈을 떴다. 어느새 발길질이 멈춰있었다. 온 몸 전체가 다 욱신 거려서 팔 하나 꿈쩍할 수 없이 그저 헛기침만 연속해서 뱉어 냈을 뿐이다.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내 턱을 잡아 올리는 거친 손을 느꼈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사정 없이 흔들리는 시야와, 퍼져 있는 공간속에서 오롯이 한성지의 웃고 잇는 얼굴만 정확하게 시야에 담겼다.

 

민규야, 설마...”

“......”

승관이 때문에 온거야?”

 

한성지는 똑똑하다.

한성지는 웃는게 참 예쁘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지독한 비린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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