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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때의 나는 비교적 얌전한 학생이었다. 가지각색 저마다 특유의 색깔을 가진 반 무리들 사이에서도 항상 특출나게 튀지 않는 포지션으로만 지속적이게 위치해왔다. 미미한 존재감을 더욱 숨기고, 내향적인 성향을 앞세우며 남들 하는것만 적당하게 흉내내며 사는 거야 말로 단조로운 일상에 나를 가둬두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그런 따분하고 답답한 모습은 남들이 볼수 있는 내 외견의 모습의 범위에 한해서 적용했을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때의 나는 남들이 보기엔 누구보다 현실에 순응해서 사는 듯이 잘 꾸며내서 연기했지만, 사실은 속 안부터 들여다 보면 무엇 하나를 감히 바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썩고 곪은 지리멸렬한 생각들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자정작용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아직은 어린이라는 단어가 통용되는 초등학교 시절때도 분명히 존재 했었던 암울한 이면이었고, 나와 한성지의 인과관계 성립점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나를 그만큼 삐뚤어지게 하고,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람이 약하다는 건 생각보다 더 비참하고 인생 자체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확고한 관념이 가져다 주는 막연한 두려움. 왜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그런 우울한 관념이 내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었는지. 그것에 대한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약한것도 죄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나는 쉽게 죄인이 되어 버렸다.
나는 약한것도 죄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나는 쉽게 죄인이 되어 버렸다.
“안녕, 이름이 승관이었지. 난 한성지야. 한 달 전에 전학왔어.”
절묘하게도 그 시절에 내 앞에 나타났던건 나이답게 밝고 무구한 미소를 가진 참 예쁜 소녀 였다.
평생 계속 될 것 같은 죄책감을 안고 죄인으로 살아 왔던 짧은 시간이 저물고, 새로운 여명이 떠오르는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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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회상은 이쯤해서 마칠까 한다. 지금 조용히 살고 있는 나의 굴욕적인 순간들을 더는 짜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결론만 짓자면, 그때의 나는 부승관의 이름 하나에 무너졌던 흑역사를 가진 너무나도 나약한 중학생 이었을 뿐이다.
뭐, 그래도 절대 유쾌한 기억은 아니지만 X 싸다 끊긴 듯한 더럽고 찝찝한 느낌이 드는 사람을 위해 다시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래, 나는 체육관에서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두드려 맞았다. 처음으로 이러다 맞아서 골로 가는 건 아닐까. 음습한 생각이 뇌리를 스칠 정도였으니까. 거의 사람 하나 잡을 기세로 때리는 오장효도 딱 소문만큼 중학생 답지 않게 참 냉혹한 면이 있었지만, 진짜 나를 더 공포스럽게 했던것은, 정말 내 입으로 인정하기는 죽을만큼 싫지만 바로 한성지였다. 한성지 그 년은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 해먹을 수 있는 나보다 한수 높은 고등한 1인자였다.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짓밟을 수 있는지, 더 괴롭게 만들 수 있는지, 지금보다 더 깊은 상실감을 줄 수 있는지, 더 깊은 바닥으로 처 박을 수 있는지. 그 모든 해답을 짧은 시간에 이해했다. 그리고 풀이 과정을 알아가기 위해 대놓고 내 앞에서 부승관의 이름을 거들먹 거리며 나를 떠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수를 알면서도 그것에 반응했다. 아, 얼마나 웃겼을까. 부승관 이름 하나에 세우고 있던 경계태세를 한순간하게 다 풀어 버리고 무기력하게 맞고만 있는 김민규 대대의 굴욕적인 모습이. 진심으로 흥미롭고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한성지의 얼굴.
“민규야, 이렇게 맞아 본 적은 처음이구나.”
얼굴이 부어서 눈 조차 뜨기 힘들지만, 흐릿한 시야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한성지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 한 번 봐볼래? 한성지의 휴대폰이 내 눈앞까지 들이 밀어졌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지만 지금 한성지가 뭘 하고 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동영상을 찍고 있는 것이다. 나는 힘빠진 손으로 앞의 휴대폰을 걷어냈다. 씨발, 엿먹이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순간 급격히 울컥함이 치밀어 여기 있는 모두를 그냥 다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왜 그래? 인터뷰 한 번 하자, 민규야.”
“...치워.”
“승관이를 대신해 여기와서 맞고 있는 소감이 어때?”
“...치워.”
“승관이를 대신해 여기와서 맞고 있는 소감이 어때?”
으, 씨발 게이새끼. 주위에서 큰 비웃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나왔다. 지금 이 상황과, 한성지가 하는 말 하나 하나가 너무나도 심각할정도로 좆같아서 도저히 견딜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주먹을 바닥으로 쾅 내려치며 한성지를 살벌하게 노려 보았다. 와, 민규야. 너 얼굴이 엄청 엉망이야. 그래도 지금 되게 잘 나와. 휴대폰을 가로로 눕히고 여전히 동영상을 찍는데에 열중한 한성지는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기는듯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지켜 보던 나는 순간의 충동으로 망설임없이 내 눈앞에 있는 한성지의 휴대폰을 뺏어 들어 바닥으로 거칠게 내팽겨쳤다. 바닥으로 꽂힌 한성지의 휴대폰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저만치까지 굴러갔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일어나기 조차 힘든 몸으로 초월의 의지력을 발동해 간신히 두 발로 설 수 있었다. 아까까지 비웃는 소리가 깔렸던 체육관 안에 소름끼치는 적막의 층이 깔렸다. 나는 진동하는 피 비린내로 마비 될것만 같은 혀를 움직여 한 글자, 한 글자 똑바로 내뱉었다.
“씨발년.”
웃고 있는 모양 그대로 굳었던 한성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잠시 물러나 있던 오장효가 다시 위협적이게 껄렁 거리며 다가왔다. 모르겠다 이제는. 이만했으면 정말 잘 참고 견딘거다, 김민규. 마음 한 켠에서 외면할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애초에 네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부승관을 위해서 이렇게 까지 하냐. 부승관이 맞는걸 왜 네가 더 두려워 하고 나서냐고. 그냥 저 새끼들 다 조져 버리라고, 하지만 정말 분하게도 그런 자극을 받고도 나는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었다. 이미 너무 맞아서 다시 맞서 싸울 힘도 없을 뿐더러, 그럴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헐... 야, 김민규!!”
오장효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서있는 내게 다시 주먹을 날리려 할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새끼들 씨발... 너네 뭐냐?”
평생들어 준환이 녀석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반가울 줄은 몰랐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체육관 안으로 뛰어 들어 오는 친구 녀석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의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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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보자마자 그대로 쓰러진 나는, 정말 상해로 입을 수 있는 모든 외상이란 외상은 다 입고 거의 한 달 내내 입원해 있어야만 했다. 내가 고작 오장효 같은 새끼한테 맞고 병상에 눕자, 정도중학교는 아주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없었다. 어떻게 김민규가 그렇게까지 처 맞지? 어떻게 김민규가 질 수가 있지? 가능한 일임? ㄷㄷ 모든 사태를 모르는 어린양들은 쓸데 없이 오장효에게 밟힌 천하의 김민규라고 부풀리기만 바빴다. 그쯤까지 오니, 나는 이 모든 일에 입달싹 하는것도 점점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부승관이라는 존나 재수 터지는 애새끼 하나 감싸주려고 처 맞았다고 떠벌릴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래서 일절 해명 없이 입 다물고 그래 멋대로 떠들어라, 식으로 방관하고 있었더니, 정도중학교에서 하늘을 찌르던 나의 위상은 주가처럼 점점 하향선을 탔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열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기를 전환하여 기회로 바꾸면 되겠다는 낙관적인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박수칠때 떠나라고, 물론 지금 '오장효한테 쥐어 터진 정도중짱 김민규' 로 박수는 커녕 동정만 받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했지만, 나는 이제 내 인생 대부분을 함께해왔던 양아치 짓을 접을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내가 쓰러지고 난 뒤에 상황은 어떻게 됐는지 준환이 한테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녀석들은 내 명령대로 내가 들어간 이후에 부승관이 올때까지 교문 앞에서 계속 기다렸는데, 30분이 지나도 오라는 부승관은 안 오고, 나도 나오지 않길래 혹시 무슨일이 생긴거 싶어 체육관으로 당장 가보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 와중에 어떤 학생 한 명이 갑자기 뛰어와서는, 자신은 바른중 다니고 있는 학생이고, 나랑 아주 잘 아는 사이라고 설명하며 먼저 가서 상황을 보고 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들여 보내줬더니, 한 10분 뒤에 갑자기 사색이 돼서 뛰어 와서는 지금 김민규 큰일 났다고, 엄청 맞고 있다고 유난을 떨어대서 다같이 체육관으로 뛰어 오게 된거라 한다. 체육관으로 도착했더니 나는 피죽이 되어 쓰러져 버리고 오장효와 무리들은 내가 쓰러지자 마자 현장에서 도망치듯 나가버렸다고 했다.
“야야, 너 그거 아냐?”
익숙하게 간이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먹는 녀석을 묵묵히 쳐다 보았다. 저 녀석이다. 나의 위험을 애들에게 알려준 아주 고마운 녀석. 이름이 윤정한인가? 물론 이 녀석과는 여름방학 초에도 만나서 이야기 한 적 있다. 내가 한성지와 부승관의 관계를 캐고 다닐때 도움을 주었던 바른중에 다니고 있다는 내 친구 동생의 친구의 형. 그때는 이름조차 외우지 못했지만... 전화 번호를 받아 저장 해두길 잘했다. 싸움 하러 들어 가기 전에 혹시 도움이 될까 몰라 윤정한에게 재밌는거 보여 줄테니 체육관으로 와달라는 문자를 보내 놓고 들어갔었는데, 내 부름에 착실하게 응답하고 달려와준 녀석은 기대보다 더 큰 공로를 세워주었다. 내 친구들보다 먼저 강당에 들어가서 내가 처맞고 있는걸 목격하고, 몰래 숨어서 그 현장 사진을 남겼던 것이다. 물론 그 사진에는 한성지도 아~주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입이 다소 가볍고 소문 내는 걸 좋아하는 윤정한은 이 대왕 건덕지를 고이 안고 있다가, 개학하자 마자 반 애들 앞에서 나와 오장효와의 싸움을 대대적으로 소문 내며 사진을 모든 애들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야, 한성지 대박. 내가 현장에서 봤는데 김민규가 존나 처맞고 있는거 한성지가 동영상찍고 존나 조롱함;'
이런 조미료 같은 말도 솔솔 뿌려주면서. 평소에 이미지 메이킹은 오지게 잘해뒀던 한성지는 처음에는 '에이, 설마 성지가 그랬겠어?' 라는 시큰둥한 여론에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기특한 윤정한이 사진까지 등판 시키면서 그제야 진실로 인정을 받은 사실이 바른중학교 전교 내에 퍼졌고, 바른중 선생님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전 바른중 교무부장 선생이 한성지를 소환해서 다른 학교 애들이 방학중에 들어와서 싸움을 했다는데, 거기 너도 개입되어 있는게 사실이냐 추궁했다고 한다. 싸움의 당사자로 있는 내가 거의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으니 바른중에서도 꽤 심각하게 여긴듯 했다. 그리고 바로 3일 전, 한성지가 있는 교실에 한성지 부모님이 찾아와서 한성지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고 했고... 그리고, 오늘은
“한성지 전학간대.”
뭐 전학?!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너무나 예상외의 급전개에 놀라움을 표해냈다. 윤정한의 입에서 나날히 갱신 되는 '한성지가 ~~한대'의 스케일이 점점 커진다 싶었다. 물론 흥미 진진하게 듣고 있었지만 설마 전학까지 가버릴 줄은 몰랐다. 윤정한은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 음료수 존나 시원하네? 같은 쓸모 없는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대답을 채근했다. 왜 전학가는데?
“몰라? 한성지 부모님이 진짜 엄격하시다던데... 엄격하게 키운 딸이 그런 추문에 휩싸였으니 그런게 아닐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 머리채를 끌고 가길래 나도 설마 했었지. 그리고 난 뒤에는 계속 한성지 학교 안 나왔다고 했잖아. 그리고 오늘 딱! 빙고. 전학 간다는거야. 한성지는 오늘도 안 왔는데, 어머니가 오셔서 한성지 책상이랑 짐 정리하더라. 어머니 표정이 어찌나 무섭던지 짐 싸실 동안 교실에서는 애들 진짜 입 하나 꿈쩍 못했대.”
“......”
“......”
이런 결말이 날 줄이야. 한성지의 큰 핸디캡이 부모님 일줄은 몰랐다. 뭔지 몰라도 나는 꽤 옳은 선택지를 골랐나 보다. 상황이 이렇게 딱 맞아 떨어져서 결론이 날 줄이야. 좀 어안이 벙벙하긴 했지만, 속은 개운했다... 아니, 사실 개운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부승관은 아직도 학교 안 나와.”
“...나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길래.”
“...나 아직 아무 말도 안했는데?”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길래.”
이 녀석은 그 싸움을 목격하면서 한성지가 내게 하는 부승관에 대한 말들도 귀담아 들은 녀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머릿속에는 이미 내가 부승관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단정되어 고이 입력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가 멀다하고 병문안 올때마다 부승관의 안위를 전해주었지만, 딱히 내게 도움이 되는 제대로 된 답변은 아니었다. 왜냐면, 그 녀석은 개학한 이래로 학교를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정한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혼잣말 말을 내뱉었다.
“왜 학교를 안나올까? 성지가 그 꼴 돼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한성지가 전학을 감으로서 부승관이 받을 타격을 생각했다. 부승관은 한성지를 좋아 하니까 이 상황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아마 지금 쯤이면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이 된 내 존재를 알아 차리고 미치도록 원망하고 있겠지.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확실히 부승관이 가는 길마다 가로 막는 훼방꾼의 성향만이 매우 강하다. 그런 나로 인해서 부승관은 자신의 애인을 전학 보내야 한다. 나는 어쩌면 부승관을 지킨 다는 명목으로, 부승관이 선택한 최고의 안식처를 빼았는 싸움을 벌인건지도 모른다. 부승관에게는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성지를 잃었다는 크나큰 슬픔 때문에 그 작고 쓸모 없는 감정은 매복 되어버렸겠지. 이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생각이다.
조금은 예외로 생각 해 볼수도 있다. 부승관은 그 날, 웬일인지 체육관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싸움 자체를 하러 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 사실을 입원해서야 깨닫고 무지막지하게 허탈해졌다. 그럼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싸운거지? 부승관이 오지 않았다면 굳이 나도 나와서 싸울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난 대체 왜 온갖 모욕과 굴욕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 입어가며, 내 위상을 떨어뜨려 가며 그토록 싸웠는가? 새삼 억울함이 머리를 들이 밀었다. 나는 정말 부승관을 잘 모르겠다. 무슨 심경의 큰 변화 있었길래 한성지 말이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녀석이 하필 그 날 나오지를 않은건지. 지금 와서야 새삼 몸 사리는건가? 아니면 계속 아파서 도무지 집에서 나올수가 없었던 건가? 갑자기 한성지가 질리고 싫어져서 장단 맞추고 싶지 않아진건가? 무수한 가정들은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냈지만, 그게 진실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부승관에게 직접 물어 보는게 가장 정합한 방법이지만, 녀석은 자취를 감췄다. 아니, 설사 학교를 나온다고 하더라도 내 연락을 받을리 만무하지만. 왜 학교는 나오지 않는 걸까? 한성지와는 헤어진걸까?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억제해본다. 이제와서 새삼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난 이제 부승관과 만나지 않을 거니까.
부승관에게 목 매다는 건 여기까지가 정말로 충분 했다. 부승관이 보면 참 쓸모 없는 짓 했다고 화낼 일들만 벌였지만, 나에게는 간절함이었다. 부승관을 원하는 간절함에서 발화된 조금은 비이성적인 행동들이었다. 그게 부승관에게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것과 다름 없다. 나는 이제 정말로, 부승관과의 이별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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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수일이 지난 후에야 나는 비교적 빠른 회복력으로 퇴원했다. 학교로 돌아와서는 전과 다름 없이 지내는 듯 했지만, 한편으로는 양아치짓을 접을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우선 처음으로 친한 다른 학교 애들이랑도 연락을 끊었고, 싸움을 하는 횟수도 줄였다. 방과 후에 딴 길로 새는 횟수도 현저히 줄었다. 자주 가는 술집에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다들 내 변화에 적응이 되지 않는 듯했지만, 김민규가 오장효와의 싸움에서 지고 트라우마 컸구나, 이 정도로만 여기는듯 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정도중 짱으로 장기집권을 한 나는 앞으로도, 고등학생이 돼서도 걸어오는 싸움을 지금 처럼 무조건적으로 피할 수 없는 더러운 숙명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가드쳐 줄 수 있는 줄 형 한 명을 소개 받았다.
“이 형이 진짜 의리 하나에 살고 의리 하나에 죽는 형이야.”
윤정한이 당시 정도고를 다니고 있던 동구형을 소개시켜 주었다. 사실 자기도 띄엄띄엄 아는 사이지만, 진짜 좋은 형이라고 친해져 놓으면 내게 많은 득을 줄 수 있을 거라 했다. 나는 윤정한이 초대해준 술자리에서 동구형과 만났고, 급속히 친해졌다. 처음부터 형님, 동생 하며 친해진 계기는 그날 술자리에서 동구형 앞에서 대놓고 촐랑거리며 은근히 맥이고 있던 선배 한 명 에게 내가 주먹을 날리면서 부터였다. 우리 은근히 마음 여린 동구형은 기분 나쁜 소리를 해도, 한 번 내 사람이 된 사람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그래서 참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가 대신 손 봐줘서 고마움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뜻하던 대로 동구형과 안면을 트고 친해졌다. 정도고등학교는 앞으로 내가 가게 될 고등학교니 동구형의 슬하에 있으면 겪게 될 짜증나는 상황에서 보호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동구형과 친한 이석민과도 친해졌다. 이석민은 활달 하면서도 은근히 무기력하고, 물욕 없고, 권세욕도 없는 딱 어울리기 좋은 친구였다. 나는 내가 이때까지 사귀고 있던 모든 질 나쁜 애들과 완전히 거리를 두고, 오로지 동구형과 이석민이랑만 만나러 다녔다. 자연스레 정도중 짱 자리에서 탈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식 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완전히 허물을 벗었다. 아, 이제 모든 것에 해방이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정도고등학교에 입학할 것이다. 그 수 개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나는 인내해왔다. 나는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우선은 복수. 나는 졸업식이 끝나고 같은날 졸업식을 했던 일월중에 찾아가서 오장효를 불러내 그때 내가 받았던 수모를 그대로 돌려주었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오장효에게 침을 뱉으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그때 있었던 일로 남 앞에서 입 놀리지마라. 평생 닥치고 살아. 알겠냐?”
어차피 한성지는 전학 가버리고, 뭐 어디서 또 부승관 같은 호구 하나 잡아서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있을수도 있지만 그건 내 알바 아니니 그렇다 치고, 오장효에게는 주먹으로 협박 하면 끝날일 이니 지금 시마이 쳤다.
윤정한의 소식통으로 따르면 부승관은 학교를 다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졸업장은 따야 하니 그런건가 싶었다. 사실 관심을 아예 끊고 있다지만, 한성지가 전학 가버리고 부승관은 대체 어떻게 사는지 내심 궁금했다. 평소랑 다를게 없고 한성지는 갔지만 여전히 싸움질은 잘 하고 다닌다는게 윤정한의 전언인데... 아무리 한성지라도 원격으로 부승관을 조종 하는건 아닐테니 자발적인 싸움이겠지.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부승관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흐릿해졌다. 나는 항상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왔으니 잊혀짐도 빠른편이다. 그러니까 부승관을 배제한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다. 평범한 고등학생, 새로운 시작. 마음이 설레고, 부푼다.
그렇게나 꿈꿔왔는데,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부승관을 다시 만난 기분은 어떻겠냐고.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한성지를 다시 본 기분은 또 어떻겠냐고.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한성지를 다시 본 기분은 또 어떻겠냐고.
연쇄적인 딜레마에 빠진다. 정말 좆같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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