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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으로 들어간다.
부승관과 나는 내 주도하에 밀회 아닌 밀회를 이어 나갔다. 나는 그 만남을 한성지를 배제하는 순수 우리 둘만의 아슬한 밀회라 정의했지만, 부승관은 딱 질색하며 내 생각을 보란 듯 부정했다.
“무슨 밀회같은 이상한 정당화 하고 있냐? 이건 그냥 네 협박일뿐이잖아.”
사람 뻘쭘할 정도로 온갖 정색을 하면서 부정한 것 치고는, 부승관은 날이 갈수록 나에 대해서 일관적으로 취하고 있었던 편협한 태도를 거두어 가기 시작했다. 의례같은 키스만 하고 찝찝하게 헤어지던, 조금은 어색하고 의무적이던 관계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간의 경과로 또 다른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 그 결과로 크게 바뀐게 있다면, 나와 부승관은 이제는 만나자마자 키스를 하지 않는다. 키스 대신 같이 뉘엿 뉘엿 늦은 시간까지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해 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기도 하고, 나 혼자서만 일방적으로 오고 가는 별거 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쉽게 빡치는 부승관을 살살 놀려 먹기도 하고, 그러다가 가끔 배가 고프다, 출출하다 싶으면 아파트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서 컵라면을 사먹거나, 부모님 퇴근이 늦는 우리집에서 미숙한 솜씨로 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나와 부승관에게는 오히려 더욱 생소할, 평범한 친구 사이에나 있을 법한 건전하기 그지 없는 날들이 쌓일수록, 아이러니컬하게 묘한 유대감도 함께 쌓여갔다. 불필요한대화지양주의 부승관 선생이 이제 나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는 수준 까지 올라왔고, 불필요한웃음지양주의 부승관 선생이 이제는 어렴풋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주로 내가 어이 없는 개그를 칠 때 '이걸 죽여, 말어?' 하는 고민이 담긴 허탈한 웃음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결론은, 부승관은 이제 확실히 나와의 만남을 귀찮아 하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안정감을 찾아간다는것.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눈에 색채 없이 녹여져 있던 폭풍 전의 고요가 사라졌으니까. 사실 어떻게 보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이 만나서 하는 그 별 거 없고, 그저 시간과 본능에 따르는 그 수동적인 순간이, 세상을 향해 내뿜던 모든 객기와 반항을 접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게 내게 더욱 희열을 주었다. 나로 인해서 변해 가는 부승관을 보면서, 부승관으로 인해서 점점 변해가는 나를 보면서.
제법 호의적이 된 부승관을 보며 욕심도 크기를 키워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의 모든걸 손에 쥐고 알고 싶었졌지만, 부승관은 그런 부분에 한해서는 결코 작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이 달고 다니는 상처에 대해서 묻는 것, 한성지에 대해 묻는 것, 그 외 사사롭고, 개인적인 질문들은 모두 침묵이나, 신경끄라는 정 없는 대답만 건네 받을 뿐이었다. 거듭된 똑같은 냉소적인 반응에 자존심과 빈정이 확 상해버렸지만, 결국은 존중하기로 했다. 부승관은 자신에 대해 캐묻는걸 극도로 싫어 하니까. 나는 부승관을 더는 연적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적대관계에 섰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친구, 혹은...그 이상의 관계 어디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나조차도 정의 하기 어려운 그 애매한 관계성을 벗어나지 못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는 것이다. 난 그 틈이 어떠한 계기가 되던지 하루 빨리 넓혀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
“여름방학 때는 못 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왜? 라고 되물을 뻔 했다. 다행히 구질하게 말로 내뱉지는 않았는데, 귀신 같이 말의 높낮이 만으로 내 기분을 알아차린 부승관이 타고 있던 그네에서 뛰어 내리며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여름방학에는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뭐야. 진짜 못 보냐?”
아쉬움과 짜증을 잘 버무려서 툭 내뱉었더니, 부승관은 정면을 보고 있던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만난지 꼬박 20분이 지난 후에야 부승관을 제대로 마주했다. 얼마전에 봤을때만 해도 눈을 살짝 덮을랑 말랑 했던 앞머리가 단정하게 잘라져 있었다. 저번주만 해도 흰 뺨에 덜렁 붙이고 있던 누런 반창고도 사라져 있었다. 상처도 참 빨리 아무네. 무슨 상황이었는지도 잠시 망각하고 딴 생각에 빠져 있는 틈으로 부승관이 비수의 한 마디를 날렸다.
“너 나 좋아하지.”
“뭐라고?”
“존나 집착질.”
쨍! 견고한 내 자존심과 긍지에 금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씨발, 천하의 김민규가 저런 좆만이 한테 저딴 말이나 듣고 있다... 사실 요즘 부승관 입버릇 중 하나다. '너 나 좋아하지' 언제더라? 저번에 부승관이 내 앞에 서 있는걸 보는데 순간 그 뒷모습이 너무 작고, 처연해 보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지 못하고 뒤에서 와락 껴안아 버렸더니, 내 손을 바로 딱 거둬내고 뒤돌아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너 나 좋아하지. 그때도 참으로 어벙벙하게 벙쪄가지고 제대로 대답을 못했는데, 그 이후에는 재미가 들렸는지 뭔지 아예 말버릇이 되어 가지고는 내가 뭔 행동 하기만 했다! 하면 반사적으로 불쑥 튀어 나왔다. 내가 반박이라도 하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어찌된게 그 말을 들으면 머리가 하얘져서 반박의 말도 떨어지지 않는다. 김민규 성질 진짜 많이 죽었네. 언제나처럼 할 말은 많은데 입 안에서만 구천을 떠도는 귀신 마냥 애절하게 뱅뱅 맴돌았다. 김민규 그 잘난 입으로 부정이라도 해라! 왜 부정도 못하겠냐고......지만, 부승관이 내가 부정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괘씸한 마음에 그냥 어, 존나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여름방학에도 만나. 이런 말이나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여름방학때까지 만나면 성지가 의심할지도 몰라.”
“의심하라 하지? 걔는 바람 필 거 다 피고, 자기 할 거 다 하고 다니는데 너는 왜 하면 안되는데.”
“그런 애 아냐.”
“얼씨구. 눈물의 실드 납셨네.”
내가 비꼬는걸 가만히 듣고만 있던 부승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묵직한 숨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한참을 말 없이 서있던 부승관이 이내 신경질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지가 바람 피운건 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잘난 씨발새끼가 나와서 꼬셨나 싶어서 나왔더니. 이렇게까지 대책 없는 씨발새끼인줄은 몰랐지.”
헐...? 예상외의 사실을 듣고 나니 절로 할 말이 소멸됐다. 아... 내가 처음이었어? 난 원래 그런 앤줄 알았지. 그렇게 따지니 한성지 바라기 부승관에게 좀 미안 하기도 하고, 머쓱해졌다. 그래도 나는 어떠한 미필적 고의도 없었고, 한성지가 남친이 있는지도 아예 모르는 상태로 만난거다. 남자친구가 있는 걸, 그것도 바른중 광라리로 소문난 무시 무시한 남자친구가 있는걸 알았다면, 애초부터 손도 안 댔을 것이다(물론 지금은 여친 있는 남자를 알고도 계속 건들고 있지만)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니라고... 김민규 가오 다 어디 갔냐고...
“아무튼 여름방학 때는 부르지말고.”
“좀 열 받는데. 일단 알겠음.”
“이왕이면 앞으로도 안 불러 줬으면 좋겠다.”
“그건 싫음.”
부승관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그러든 말든 난 노상관 표정으로 서 있는 부승관의 손을 당겨 잡았다. 그냥 쉽게 잡혀주는 부승관의 얼굴에는 체념이라는 명확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작은 궁금증이 일어났다. 부승관은 나를 어떻게 생각 하고 있을까. 성지를 꼬신 천하의 개새끼라며 딱히 엄청 혐오하고 싫어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좋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내게만 관대한 부분도 있다. 첫만남 부터 키스하고 들어간 것도 그렇고. 말도 걸걸하게, 행동도 싸가지 없게 하지만 내가 하는 스킨십은 다 받아 주고. 그러면서 자기 애인인 한성지에게 딱히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닌듯 하다. 모순적이고, 모순적인 행동이 거듭 된다. 확실히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다. 딱 나와 부승관 사이에만 용인 되는 참으로 기묘한 관계. 나는 부승관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질 수록, 녀석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물기 시작하는 중학교 시절의 마지막 호기심이었다.
-
여름방학이 시작 되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주구장창 밖으로 쏘다녔다. 놀던 애들이랑 펜션 하나 빌려서 여름 휴가는 제대로 즐겼고, 늦잠도 원없이 자고, 싸움도 원없이 하고, 천하태평하게 중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을 즐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부승관에게 시간 날때마다 카톡을 남겼다. 야, 뭐하냐, 어디냐… 시시콜콜한 안부 카톡에 달리는 대답은 없었다. 1표시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내 카톡은 안읽씹이 답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노는 와중에 소홀 하지 않은게 있었다면, 바로 조사였다. 구체적으로 한성지에 관한 조사. 항상 궁금 했다. 한성지는 뭔데 그렇게 일찐짓하면서 부승관을 꿈쩍 못하게 하는건지, 바른중에서 한성지의 위상은 어느정도 인지, 전교생 모두가 한성지의 그런 악질적인 업적을 알고 있는건지, 언제부터 부승관과 교제하기 시작했는지.
한성지랑 데이트 한다고 하고 난 다음 날이면 항상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녀석을 보며 들었던 의아함을 해결 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바른중에 인맥 이라고는 부승관, 한성지 당사자들 밖에 없는 터라, 바른중에 다니는 내 친구 동생의 친구의 형(…)을 통해 어느정도까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성지? 걔는 그냥 부승관 여자친구로 유명한데? 내가 알기로는 한성지, 부승관 이 둘이 초딩때 부터 친했어. 초딩때만해도 부승관 얘가 의외로 존나 조용하고 얌전하고, 존재감도 없고, 약했었거든. 근데 희안하게 얘가 중학교 들어와서는 갑자기 날고 기고 하는 애새끼들 주먹으로 휘어잡으면서 광라리로 등극한거지. 그쯤 돼서는 또 이상하게 부승관이랑 한성지랑 사귀기 시작하더라? 한성지도 좀 이상했어. 아무리 어릴때 친했었다고 해도 왜 하필 부승관이랑 사귈까 했지. 그래서 우리끼리 막 '부승관 구원하기 위해 온 성지는 성자'라고 농까고 그랬어. 한성지는 부승관 여친이 된 이후로도 그냥 계속 착하고, 잘 웃고, 남들 잘 도와줘서 전교 부회장도 하고 그랬거든. 근데 그런 애가 광라리랑 사귀니까 바른중 전대 미문 미스테리지. 그래서 그런지 둘 다 학교 안에서는 사귀는거 티내고, 서로 아는 척하고 지내지는 않아. 그냥 서로 생활 있으니까 안에서는 배려하는 느낌인듯. 근데 그건 왜 물어?”
아...나는 절로 순수하고 착하게 한성지가 만든 이미지에 속아 넘어 가고 있는 바른중 애들에게 안타까움의 탄식을 쏟아낼 수 밖에 없었다. 나만 속아 넘어 간줄 알았더니 세상 사람 어리석은건 다 똑같구나. 그래도 초딩때는 부승관이 얌전한 찌질이 였다는건 꽤 수확 좋은 발견이다. 처음부터 광라리는 아니었다는 거니까. 난 이 사실을 머릿속에 잘 보관 해두었다.
아니, 그럼 한성지가 그런 일찐짓들 하고 다니는건 극히 일부 밖에 모르는 거야? 학교 안에서는 이미지 메이킹 오지게 하는 거고? 놀랍다, 놀라워. 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쳐서 먹던 쭈쭈바를 입에서 빼내었다.
“아, 근데 한성지가 몇 개월 전에 너랑 사귄다는 소문 돌았을때 있었거든. 정도중 김민규랑 사귀니, 마니, 바람이 났니, 뭐니. 같이 있는걸 봤다느니, 정도중에서 이야기를 들었다느니... 근데 그때 좀 의아했던게 딱 소문 돌기 며칠 전에 부승관이 우리학교에 이유희라고, 좀 까진 애가 있어. 근데 뜬금없이 걔랑 사귀는 것처럼 손 잡고, 껴 안고 다니면서 대놓고 연인 행세하고 다니더라? 그리고 난 다음에 한성지는 너랑 사귄다고 소문이 나니까... 그게 합쳐져서 무슨 시너지를 내겠음? 부승관이 이유희랑 바람 나서 한성지랑 헤어지고, 한성지는 김민규랑 사귀게 됐다더라. 이런 소문이 쫙 난거지! 근데 지금은 둘이 다시 재결합 한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너 진짜 한성지랑 사귀었냐?”
“...어. 잠깐 사겼지.”
“대박. 한성지 걔도 딱 급 되는 사람만 사귀네. 그런 의미에서 난 한성지도 좀 무서워. 부승관이랑 왜 사귀는지 모를 정도로 착하다고 하는데, 부승관도 남들 보기엔 얌전하고, 착하게 생겨 먹어서는 광라리짓 하잖아. 여자친구인 한성지도 그럴지 누가 알아? 게다가 별 신비성 없는 소문이기도 한데, 한성지가 실세라는 이야기도 있고.”
응. 그 소문은 어느정도 사실이야. 그렇게 단호하게 대답 해주고 싶었지만, 주제가 바뀌는 건 싫어서 모르는 척 연기 좀 했다. 그건 또 무슨 이야기야? 지금 만난 놈이 남들에게 말하는걸 좋아하는 놈이라 천만 다행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건 간이고 쓸개고 다 빼내서 이야기 해줄것만 같다.
“한성지랑 사귀고 난 뒤에 부승관이 유독 더 싸움을 많이 하고 다녔거든. 진짜 미친 새끼처럼 학교 안, 밖 안 가리고 싸우고 다녀서 부승관 앞에서는 시비 털릴까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니까. 상식적으로 좀 이상하잖아? 원래 노는 애도 아니었는데 중학교때 갑자기 싸움을 시작한것도 이상한데, 조용하고 얌전해서 좋은 영향만 줄 것 같은 한성지랑 사귀고 오히려 싸움 빈도수를 더 늘려 간다는게. 아. 이건 진짜 비밀이고, 내 후배가 본 건데... 예전에 중학교 2학년때 인가? 호수중학교랑 시비 텄을 때 부승관 혼자 1대 10으로 진짜 개처럼 싸움하고, 크게 다쳤을때가 있었거든? 근데 그 현장에서 부승관은 피터지게 존나 싸우고 있는데, 한성지는 멀찍이 상전처럼 앉아서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는 거야. 지 남친 뚜들겨 맞고 있는데 여친은 동영상이나 찍고 있었다는게 좀 섬뜩하지 않냐? 그 외에도 큰 싸움 있으면 항상 부승관이 한성지 대동해서 같이 간다는 말도 있고... 아무튼 당사자들한테 안 들으면 아무도 모를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 듣고 한성지가 좀 달리 보이긴 하더라.”
이것 역시...한성지를 만나고 올 때마다 싸움을 하는 듯 보이는 녀석을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내가 봤던 한성지의 성격을 미루어 보더라도. 근데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천하의 부승관은 왜 한성지한테 싸움으로도 휘둘리고 다니는가. 이 답답함의 굴레에 빠진다. 이것 역시도 한성지를 향한 무한한 애정에서 기반한거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왠지 지금 이러고 있는 내 자신이 비참해 질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생각은 많아 지는데, 이상하게 결론이 나지를 않았다. 한성지, 부승관. 둘 사이에는 내가 들어갈 자리 없는 세월으로 만들어진 둘 만의 견고한 벽이 있는 듯한데, 그 벽을 억지로 깨부수려니 힘들다. 크레인이라도 끌고 와야하나.
내가 말 없이 상념에 빠져 있는 걸 보던 녀석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방학때도 부승관 크게 싸운거 알고 있냐? 장난 아니었다는데.”
“...뭐?”
“부승관, 한성지에 그토록 관심 많은 애가 그것도 몰랐어? 작년에 졸업한 선배랑 싸웠는데. 그 선배도 진짜 싸움 장난 아니거든. 존나 처 맞았지, 뭐... 아무튼 부승관 지금 입원해있어.”
나는 평정을 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들고 있던 쭈쭈바가 바닥으로 뒹굴고 있었다. ㄴ...너 왜 그래? 눈에 띄게 사색이 된 나를 보며 녀석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어디 병원?”
-
늘바른병원.
간판을 눈으로 읽어 내리다가, 재촉하는 걸음을 멈췄다. 부승관이 어떻게 알고 왔냐 물으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하지? 쥐고 있던 주먹까지 펴며 고민했다. 너랑 한성지 뒤 좀 캐다가 그랬어. 사실대로 술술 불면 무슨 반응일지 안봐도 뻔하다. 적당히 꾸며낼 무언가가 필요한데. 아는 사람이 입원해 있는 병원 왔다가 우연히 병실에 네 이름 보고 와봤다고 할까? 그냥 바른중 아는애랑 이야기 하다가 네가 입원 했다는 이야기 들었다고 할까? 머릿속을 채우는 고민들은 일단 접어두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512호. 왠지 모르게 가슴을 누르는 중압감과 함께 엘리베이터 5층을 눌렀다.
“어, 민규야.”
512호로 걸어가는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설마, 하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는 역시가 된다. 몇 달 전과 다름 없는 하얀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다가 오는건, 한성지였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대충 묶고 있었는데도, 주변이 환해질정도로 여전히 예뻤다. 아. 이런 곳에서 만나니 곤혹스러워도 이렇게 곤혹스러울 수가. 나는 대놓고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야? 혹시 승관이 병문안 온 거니?”
나긋한 목소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듯한 여유를 노골적이게 담고 있어서, 말문을 잃게 했다. 나는 그냥 한성지를 노려 보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씨발, 이렇게 타이밍도 좆같을수가.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승관이한테 들었어. 요즘 둘이 친하다구... 그때 한창 싸웠었는데 역시 한 번 싸우니까 빨리 친해지는 것 같아. 그치?”
“야, 한성지. 난 부승관 만큼 무르지도 않거든. 거짓말도 정도껏 쳐”
“민규야, 말 되게 심하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는데...”
한성지의 웃는 표정은 거둬지지 않았지만, 말에는 뾰족한 가시가 선게 느껴졌다. 나는 대꾸 없이 한성지의 옆을 지나쳤다. 괜히 말 섞었다가, 무슨 함정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민규야,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데.”
저 나긋한 목소리는 왜 소리가 작아도 저렇게 선명하게 잘 들리는 걸까. 꼭 악마의 속삭임 같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몇 명 없는 황량한 복도에 웃으며 서 있는 저 가녀린 소녀가 한 명.
“거기서 그러더라? 인간들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 버려야 한 대.”
“......”
“왜냐면... 인간들은 사소한 피해를 입으면 보복하려고 드는데,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복수할 엄두 조차도 내지 못해서래.”
“......”
“나는 다정한게 좋았는데, 이 말을 듣고 보니 짓밟는것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승관이 자다가 방금 일어 났더라. 그럼 병문안 잘 하고, 조심히 돌아가. 또 보자.
나는 한성지의 뒷모습을 멍히 쳐다 보았다. 한성지는, 비유적으로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나를 짓밟을수도 있다는 걸.
어쩌면 짓밟혔을수도 있을 부승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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