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8년 김민규의 인생은 두 파트로 나뉜다. 부승관을 만나기 전과, 만나고 난 후.
때는 중학교 3학년으로 돌아간다. 부승관과 내가 싸우고, 또 부승관이 주도한 키스를 하고, 부승관이 질질 짜는 걸 보고 난 후. 그 후로부터 일주일동안 난 거의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부승관을 생각하며 지냈다. 처음에는 좆같은 감정이 지배적이었다. 아니, 씨발. 호모도 아닌데 같은 남자 새끼가 입술 부비는건 실로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 날은 내가 키스+부승관 눈물 콤보로 인해서 머리가 거의 백지 수준으로 하얘지는 바람에 어영부영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지만, 그 기억은 잔상처럼 남아서 내 머릿속에서 끊임 없이 리플레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분노도 자연스레 커져서 바른중 처 들어가서 죽여버릴까?? 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 극악한 생각은 비록 중학생 신분이지만 경험은 수두룩하다고 자부하는 내가 키스 하나에 이런 발작을 하는게 하찮아 져서 금방 접혔다. 그러다 보니, 이제 좆같은 감정은 증발 하고 왜? 라는 의문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체 처음 보는 나한테 키스를 왜 한거지? 주먹 날리고 발 날리며 싸우던 상대한테 난데 없이 치킨 게임이니 뭐시기니, 염불 같은 말들을 늘어 놓으며 사람 혼을 빼놓고는 기습으로 키스 하고, 눈물까지 또르르 흘리는 미친 새끼가 이 세상 어디 있단 말야? 얘는 원래 이런식으로 싸움 하나? 싸움 전리품으로 상대방의 입술을 훔치는 그런 성벽이 있는건가? 거기까지 생각 하다가 그것까지 상상하고 있는 내 자신이 볼품 없이 느껴져서 그 역시도 접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부승관을 다시 한 번 만나 보기로.
“야.”
“......”
그래서 정확히 2주가 지났을 무렵, 바른중에 찾아왔다. 한성지를 마주할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바른중 교문 앞에서 대기를 타다가, 아무나 지나가는 애를 붙잡고 야, 부승관 좀 불러와봐. 명령했다. 그 애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른중VS정도중 맞짱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연한 기대를 한 얼굴이라 머쓱하기도 했다. 사실 굳이 말하면 맞다이 까려고 들어온 건 아닌데. 점점 나를 보는 노골 적인 시선들이 느끼며, 끝내 나는 교문 밖으로 나가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부승관을 데리러 간 애는 부승관을 재창조해서 오고 있는 건가. 애들이 다 빠져 나온 것 같은데 부승관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마빡에 힘줄 마크를 하나, 둘 새겨 가고 있을 때 즈음, 나는 교문을 나와 너무도 당당하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그때 딱 한 번 봤지만, 그 평범한 얼굴은 어찌된게 뇌리에 콕 특이박혀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부승관!! 놓칠 새라 재빠르게 불러 세웠더니, 녀석은 뒤돌아서 나를 보았다. 잠겨 있는 눈동자는 커다란 물음표를 담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라 빡이 올라오려는 순간, 이내 녀석이 드디어 나를 떠올렸는지 살짝 눈이 커졌다. 굉장히 의외라는 눈빛 이었다.
“뭐야. 왜 왔냐?”
“뭐긴 뭐야. 씨발아. 그때 니가 한 그 짓 책임 물으려고 찾아왔다 왜.”
나를 한참을 쳐다 보며 골똘히 고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부승관이 별안간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고 이리 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저 새끼 뭐하지? 무슨 속셈이지? 궁금증에 못 이겨 재촉하려 했지만 입 놀리기가 귀찮아서 참았다. 착하게도 잠자코 지켜만 보고 서있는 내 앞에 부승관은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내더니 내 앞에 보란 듯 내밀었다.
“이거면 되냐?”
쫙 펴진 하얀 손바닥 위에 구깃구깃 접힌 모양으로 올라 와 있는건 푸른 배춧잎이었다. 근엄 하게 찍혀져 있는 세종대왕님의 형상과, '10,000' 이라는 현실 감각 쩌는 숫자를 멍하니 읽어 내리다가 순간적인 현타가 머리를 관통 하기 시작 했다. 이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남아 지금 이 상황과 오버랩 되는 걸 보며, 나는 큰 환장의 도가니에 빠졌다. 책임 지라고 했더니 돈을 꺼내놓는 이 물질만능주의 사고방식은 대체 무엇? 게다가 10만원도 아니고 1만원?내가 지금 이런 1차원적인 생각이나 하는 애새끼랑 무슨 쇼부를 보겠다고 여기까지 온거지? 지금 이거 그거냐? 먹고 떨어져?...그것도 1만원으로?
가시지 않고 여운을 크게 남기고 있는 현타와, 무어라 대응을 해야 할지 가닥 조차 잡히지 않는 상황을 자초한 부승관에 대한 환멸으로 할 말을 상실한 내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내 반응을 살펴보던 녀석이 이내 나직 하게 증얼거렸다. '에라이, 어린놈새끼가 돈 좋은 줄은 알아가지고.' 가방 지퍼를 열고 아예 지갑을 통채로 꺼내고 있는 부승관을 멍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야 씨발새끼야!!!”
경적 소리 저리 가라, 목청 좋게 바른중 교문 뒤에서 고래고래 씨발새끼를 찾는 내 목소리에 놀란듯 부승관은 눈썹을 성나게 치켜 올리며 멈추었다. 부승관의 지갑에서 50,000원 짜리가 나올랑 말랑 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 경관을 보던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지거리들을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5만원? 5만원 이면 먹고 나가 떨어 질수도 있을 것 같고. 돈에 한해서는 한 없이 이해타산적인 유전자를 이찌방으로 먼저 내세우는 나는 5만원 받고 그냥 입 닫고 꺼져 줄까, 일순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지금 와서 앗! 5만원이면 먹고 떨어질게 ㅂㅂ 한다면그 다음 날 정도중 김민규, 5만원에 팔아 버린 체면과 자존심..? 이라는 특보가 동네에 대서특필 될 게 뻔하니 애써 감내했다. 그래, 내가 원하는 목적은 돈을 줘도 살 수 없다. 5만원이든, 50만원 이든, 500만원이라면....흠흠, 아무튼 좌우지간 살 수 없다.
“돈으로 쇼부 보자고 찾아 온거 아니거든?”
“너 아까 돈 꺼낼때 눈 빛나는거 다 봤음.”
“필요 없고. 일단 이유 먼저 묻자. 왜 그랬는지.”
부승관이 다시 신경질적이게 지갑을 가방에 처 박으며 나 들으라고 하는게 뻔한 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더럽게도 엮였다는 묵언의 표시 일 것이다. 알게 뭐람. 그래도 넌 저지른 일이 있으니 내가 무슨 변명 같은 말이라도 이행 해야할 신의 성실의 의무가 있다고. 한시 빨리 입을 놀려주기를 기다리는 내 바람과는 다르게 녀석은 묵비권을 행사할 작정인지 한참을 나를 노려 보기만하고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녀석을 제법 가까이서 대놓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저번에 나와 싸웠을때 난 흉터가 얼굴 곳곳에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는게 제일 먼저 보여서 살짝 뜨끔했다. 나 역시도 녀석에게 맞은 흉터가 아직도 무슨 전리품마냥 곳곳에 남았지만, 왜 부승관이 저런 상처 달고 있는 걸 보는건 소름 끼치도록 이질감이 드는지 모를 노릇이다. 싸움과는 거리가 삼 억 광년쯤 멀어 보이는 새끼라서 그런가. 나는 새삼 깨달으며 부승관을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말랐다. 평범하다. 수수하다. 전체적으로 단조로운 이미지에 광라리 라는 별명이 더해지니 기괴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키스 이야기는 제쳐 두고, 대체 네가 어떻게 하다가 바른중 광라리로 태어 났는지, 그 파이터 본능은 어디서 각성 된건지 그 역사 이야기라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삼천포로 생각을 빼놓고 있을때,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몰라.”
“뭐?”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걍 그렇구나 하고 넘겨. 네가 기분 나쁜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미안한데 그런 소모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주라.”
“그렇게 못하겠으면?”
“그럼 분 풀릴때 까지 때려.”
녀석은 망설임 없이 가방을 내려 놓고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자신의 뺨을 들이 밀었다. 나는 내 앞에 들이 밀어진 녀석의 말간 뺨을 멍하니 내려다 보다가 나도 모르게 픽, 헛웃음이 새어져 나왔다. 이 새끼는 과연 알지 모르겠다. 그런 상식 밖의 언동이 오히려 내 전의를 잃게 만들고 있다는 걸.
나는 주먹 대신 양손으로 녀석의 볼을 잡았다. 그리고는 양손에 바로 잡히는 녀석의 동글 동글한 얼굴을 내려 보다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해가 중천에서 멀어진 지금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교하는 바른중 애들의 모습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내 호기심과, 스물 스물 피어나는 기묘한 감정의 방아쇠를 당기듯, 나는 오른 속으로 녀석의 턱을 조금 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눈을 감고, 녀석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가져갔다.
나는 녀석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바로 얼굴을 뗐다. 부승관은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듯 별 반응 없이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내려 놓았던 책가방을 다시 매며 건조한 목소리로 툭 말을 던졌다. 나 역시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쌤쌤친거네.”
“누가 쌤쌤이래?”
“다시는 보지 말자. 나간다.”
나를 지나쳐 가는 녀석의 팔목을 세게 붙잡았다. 가는 길 붙잡힌 녀석이 다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데? 아까보다 더 가라 앉은 살벌한 읊조림이 들렸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너 번호 좀 줘.”
“아, 진짜 씨발. 듣자 듣자 하니까 미친새끼가 별 ㅅ...”
“나한테 한성지한테 꼬바를 수 있는 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치.”
예상대로, 한성지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부승관의 눈빛 부터가 달라졌다. 아까는 냉정한 짜증이 스며 있었지만, 지금은 그 초반의 페이스를 다 순식간에 잃고 동공에 강도 높은 지진이 나고 있다. 그래. 그래도 니가 한성지 남친 명분으로 있는데, 이거 알려지면 그 한성지 성격에 얼마나 큰 후폭풍이 몰아칠까.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할 말을 잃은듯 흔들리는 동공만 보인 채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부승관이 숨과 말을 동시에 토해냈다.
“...너 성지한테 말하면, 진짜 죽을 각오해. 나는 진심으로 경고 하는거야.”
“내가 네 손에 죽을 일은 절대 없으니 그런 말은 안 통하고. 말하냐, 마냐는 네가 네가 선택할 문제겠지?”
“아, 이 새끼가, 진짜.”
분노를 못 이기는듯 옆에 담을 세게 걷어 차고 있는 부승관을 보며 나는 여유로운 웃음을 걸고 내 휴대폰을 녀석에게 건네주었다. 애꿋은 벽을 차는걸 멈추고 나와 휴대폰을 번갈아 가며 보던 녀석이 내 휴대폰을 낚아채듯 들고 던지려는 시늉을 하려 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곱게 안 알려주면 성지한테 물어 보는 방법도 있지.”
“...미친새끼지, 너.”
“나 아직 성지랑 안 깨졌어. 깨지고 싶어도 한성지가 아직 완전히 날 놓아준 것도 아니라서. 이 상황에서 한성지한테 네 행동 꼬바르면 피해 보는건 순전히 너 뿐이지. 나는 한성지한테 좆도 관심 없어서 까이든 말든 상관 없지만. 너는,”
좋아하잖아, 한성지.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이 변했다. 분노로 팽팽 하게 당겨져 있던 얼굴의 힘이 스르륵 풀리며 그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싹 해질정도로 더욱 흉흉한 살기가 둥둥 떠올랐다. 꾹 다문 입술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그 표정이 증명해주었다. 부승관은 한성지 이름 하나에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걸. 사실 나도 과연 부승관이 한성지를 얼마만큼 좋아 하나? 이 문제만큼은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여서 불확실한 단정으로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 부승관의 살벌한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내 상상 이상으로 한성지를 생각하고 애틋하게 대하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하긴, 여친이 대놓고 바람 폈다고 시인 했는데도 그리 친절하고 태연하게 대하는 사람이 어딨어? 완전 호구에다가, 눈물겨운 순애보지. 이렇게 따져서 결국 종합적인 결론을 내보면 한성지를 이용한 협박은 반 이상 먹고 들어갈수 밖에. 더군다나 한성지는 그 날, 나와 부승관 사이에서 외줄타기 하며 저가 주최한 우리 둘의 개싸움을 마음 껏 즐기다가, 결국 둘중에 한 명 선택해야 하는 그 의무는 다음을 기약하며 떠나버린 아주 애매한 상황이다. 생각해보니... 아마 그때 부승관이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것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성지를 나한테서 뺏길수도 있다는 분함과 괴로움. 그 감정이 격해지면서 경쟁상대가 되어 버린 내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키스를 하는, 다소 어이없고 비상식적인 선택을 했을수도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점점 더 가닥이 잡혀 가는 것만 같다. 나는 아까보다 더 자신감 넘치게 부승관을 바라 보았다. 이 협박도 통하지 않는 다면, 다시 한성지 한테 작업 걸어서 부승관에게서 한성지를 뺐는다는 극단적인 방법도 강구할 수 있다. 물론, 그 상황까지 오지 않기를 바랬다. 한성지한테는 이미 정이 떨어질때로 떨어졌고, 그 가식의 가면이 벗겨져서 악랄한 모습을 보고도 한성지를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너 나한테 대체 왜 이래? 나 좋아해?”
“아니. 그냥, 재밌잖아.”
“......”
“그러게 괜히 키스 해가지고 사람 시험에 들게 한건 너니까 그냥 네 업보겠거니 생각해라.”
나는 부승관에게서 내 휴대폰을 얌전히 돌려 받았다. 낯선 숫자 11자리가 액정에 떠올라 있었다. 그걸 보자, 나는 이겼다는 묘한 성취감에 휩싸였다. 이로서 부승관과 나의 제로섬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걸 확신할 수 있다. 부승관은 아마 그 날, 자신이 이겼다는 단정과 함께 지금의 나와 비슷한 성취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황이 야기한 또 다른 국면은 예상치 못했을 것 이다. 가소로운 객기로 했을게 뻔한 그 키스 하나의 파급력을 고려 하지 않은건 분명한 과실이었다. 그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순간 순간의 판단으로 살아 가는 나조차 알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날 올려다 보고 있는 부승관을 향해 씩 웃었다.
“연락할게.”
-
부승관의 번호를 얻고 나서도 한 달 넘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보는게 더 옳은 말이다. 그동안 이리저리 한성지와 부승관의 콜라보로 잠시 잊고 살았던 유혹적이고 달콤한 양아치 짓에 다시 버닝하며 동분서주 홍길동 처럼 번쩍 번쩍 날아 다녔으니까. 기쁘다, 축!김민규 컴백! 내가 다시 정도중을 평정하기 시작 하자 주인 잃은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있던 모두가 안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아니, 근데 성지랑은 어떻게 된거야? 그 질문이 내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 올때면 토론방 하나 만들어서 한성지년의 반전 있는 악행을 줄줄 외주고 싶었지만, 마지막 남은 전 여친에 대한 예의로 함구했다. 아, 걍 그럴 일이 있었어. 아픈 과거 더는 묻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더니, 애들은 궁금해 하는 내색을 보이면서도 내게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너희도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을 것이야. 한성지년의 실체를.
그리고 나서 내가 다시 한 번 부승관을 마주치게 된 건, 뜻밖에도 내가 가는 단골 술집에서 였다. 그날은 내가 집에 잠시 들렸다 나올 일이 생겨서 애들을 먼저 보내고 뒤에 합류 하기로 되어 있었다. 집에서 막 나서려는 찰나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언제나 내 옆에 찰떡같이 붙어서 딸랑 딸랑 거리며 줄 타기를 하고 있는 준환이 녀석이었다. 민규야 네가 없으니 허전방구해 빨리와, 이런 아양과 티나는 가식일게 뻔해서 받지 않으려다가, 결국 수신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시끄러운 잡음들이 요란하게 섞여 들려왔다. 아 뭐야.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트렸다가, 여보세요? 여보세요? 건너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다급한 준환의 목소리에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큰일 났어. 여기 싸움 났어 빨리 좀 와줘!!
“뭐? 누구랑 싸움 났는데.”
- 아 몰라! 싸움 존나 잘해 우리 테이블 앉아 있길래 비키라고 했더니 지금 이 지ㄹ...아, 야야, 저 새끼들 누구냐?......바른중? 바른중 애새끼들이래!
바른중?... 한 달 만에 듣는 그 바른중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자 마자, 순간의 불안감이 나를 덮쳐 왔다. 나는 일렬로 들어서는 생각들을 차곡 차곡 쌓으며 한참을 침묵하다가 민규야, 어디까지 왔어!! 급하게 외치는 준환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바른중 광라리도 거기 있냐?
- 바른중 짱? 난 얼굴을 모르니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아, 근데 진짜 쌈 잘하는 새끼 있는데 존나 애비애비하게 생긴 새끼ㄱ...
“기다려. 바로 갈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현관문을 열고 뛰쳐 나갔다. 이러면 안되는데. 자꾸만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내가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내 앞에 나타나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굳이 우리 동네 술집 까지 찾아 와서 존재를 부각 시켜 주고 있는 과오투성이, 헛점투성이 부승관..
거의 닌자 움직임 수준으로 날다시피 해서 술집 근처로 도착했더니, 앞에 경찰차가 세워져 있는게 보였다. 규모가 커진 싸움판이라 주인 아저씨가 겁에 질려 경찰을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경찰차를 보는 순간 자연스레 뒷걸음질 치며 홀연히 다른 건물 뒤에 몸을 숨겨 정황을 살폈다. 이야, 싸움판도 엥간히 커졌나 보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는 내가 낄 수 없다. 의리 없이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싸움에 나 같은 애가 연루 됐다가는 정말 퇴학 먹을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라 몸을 사려야 한다. 그나저나... 부승관도 그럼 저 안에 있으려나. 모처럼 재회하나, 했더니 상황이 이리 도움을 안 준다. 뭐, 번호는 있고, 불러낼 구실도 있으니 조만간 다시 만나면 되겠지.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서 다시 되돌아 나가려는데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내 어깨위에 손을 올렸다. 경찰차를 봐서 안 그래도 잔뜩 쫄아 있던 나는 어깨에 닿는 차가운 손을 느끼며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돌았다.
“왜 소릴 질러. 조용히 해. 너 여기서 뭐하냐?”
“하... 씨발, 깜짝이야.”
정말 뜻밖에도, 눈 앞에는 나를 열렬하게 등신 취급 하고 있는 듯 보이는 부승관이 서 있었다. 이건 정말 예상외의 재회여서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부승관을 내려다 보았다. 너야 말로 여기서 무얼 하시는...? 싸움의 주역이신 당신은 저 경찰차 타고 끌려 가야 정상 아님?
“너 저기서 싸움하고 있었던거 아냐?”
“도망쳐 나왔어. 안 걸리고 조용히 나갈 수 있었는데... 주인한테 들키는 바람에 존나 튀었지.”
특유의 세상 오만 짜증을 담은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허허, 웃음이 나왔다. 이 새끼 의리 없는 것도 나랑 닮아서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려 한다. 어느새 내 뒤에서, 건너편으로 옮겨 와서 고개를 쭉 빼고 밖을 살피는 부승관의 둥근 뒤통수를 홀린 듯 쳐다 보았다. 부승관은 밖을 한참을 쳐다 보다가 답답함의 짧은 숨을 쉬며 다시 고개를 원위치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나는 부승관을 마주 보며 물었다.
“우리 애들이랑 싸움은 왜 한거야?”
“...먼저 앉아 있었는데 지네 자리라고 시비 털었대. 나도 몰라. 늦게 왔더니 쌈질 하고 있길래 얼떨결에 낀거라. 야, 너도 저거 갈때까지는 나가지마. 지금 잠시 동안은 이 주위에 정도중, 바른중 교복입은 애새끼들 보이면 다 단속할거야.”
씨발 내가 여기 왜 와가지고. 걸죽하게 욕을 뱉어내는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수수 했다. 입술 옆에 살짝 맺혀 있는 핏방울은 수수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녀석의 입술 옆을 쓸었다. 부승관이 움찔, 하며 다시 내 쪽을 바라 보았다. 너 피나. 건조하게 던진 내 말에 손등으로 입술을 몇 번 쓸던 녀석이 나를 똑바로 마주 보며 답했다. 신경 꺼.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한 달 동안은 또 현세에 빠져 부승관에 대한 이렇다 할 생각 없이 살아 왔는데, 지금 또 내 앞에 변함 없는 녀석을 보니까 이상 야릇한 감정이 당연하게 밀려 오는걸 부정 못하겠다. 내 맞은편에서 제법 가까이서 붙어 있는 녀석에게는 가지고 있는 위험한 분위기랑 맞지 않는 깔끔하고, 단정한 냄새가 세제향이 나고 있었다. 이런 사소함에서 부터 1부터 10, 모든 선입견의 선입견을 당연한 듯 깨부수는 모순덩어리의 인생을 살고 있는 놈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승관은 내 흥미를 돋구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반복되는 조금은 지겨운 일상의 셔터를 내리기 위해 드러난 존재.
나는 마주하는 부승관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며 녀석의 어깨를 마주 잡았다. 부승관은 자신의 어깨에 닿은 내 손과 나를 좀 불안한 눈빛으로 번갈아 가며 쳐다 보았다. 아, 이새끼 또 시작이네. 이런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만날 때 마다 이럴거야?”
얼굴이 반 쯤 닿을랑 말랑 가까워져 왔을 때, 부승관이 내 목을 살짝 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럴 예정은 없어도 어차피 부승관을 보면 자연스레 그렇게 될 것만 같으니 부정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여기서 때리면 한성지 빌미로 협박할거지.”
“잘 아네.”
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부승관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명백한 반항은 없었다. 나는 끝내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부승관은 이상하게 키스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자신이 할 때도, 내가 할 때도 .
그런 모습이 내 본능을 자극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이상야릇한 감정의 크기를 키워 가게 했다는걸 아는지.
시작되는 위험하고, 나만 애달프고 애처로운 관계의 모든 시발점이 나를 향한 너의 그 어중간한 호감과, 밀어내지 않는 그 무기력함 때문 이었다는 걸 아는지
'장편 > [규부] 배틀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규부] 배틀로맨스 10 (0) | 2018.02.25 |
|---|---|
| [규부] 배틀로맨스 09 (0) | 2018.02.25 |
| [규부] 배틀로맨스 07 (0) | 2018.02.04 |
| [규부] 배틀로맨스 06 (0) | 2018.01.28 |
| [규부] 배틀로맨스 05 (0) | 2018.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