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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규부] 배틀로맨스

[규부] 배틀로맨스 01

아카슈아로 2017. 12. 31. 13:19



무언가를 꽝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앉아있는 의자에 느껴지는 강한 세기의 진동에 자의가 아닌 타의로 벌떡 상체를 세웠다. 갑자기 깬 잠 때문에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인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이번엔 내가 방금까지 머리를 대고 있었던 책상이 내 눈앞에서 처참히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아직 꿈속인가. 멍하니 상황파악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지금 누군가 고의로 내가 자고 있는 의자를 걷어차고, 책상을 넘어뜨린거 맞는거지? 나는 책상 서랍에 처박아 두었던 온갖 과자 봉지들이 슬금슬금 바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걸 보다가, 드디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 씨발...누구야.”


드디어 뇌에 깨끗한 피가 온전히 순환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결 또렷해진 정신으로 매섭게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눈에 봐도 호기심과 난감함이 섞인 반 애들이 멀리 떨어진 상태로 일제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익숙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아까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어렴풋이 지레짐작했던 인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 그 광견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기습을 방어하려 뒤도는 순간, 복부에 강하고 딱딱한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 들어와 꽂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억- 육성으로 짧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버렸다.


“일어나.”


씨발. 키도 자라다 만 게 힘은 더럽게도 세네. 다 들리게 증얼 거리며 배를 문질렀다. 무표정의 녀석이 다시 또 습관처럼 주먹을 쓰기 전에 이번엔 내가 먼저 일어나 재빠르게 멱살을 움켜쥐었다.


“진짜 미쳤냐? 좆만이가 시비질이야.”
“나와.”


너는 지랄해라, 나는 내 할 말만 한다는 얼굴로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있는 부승관은 흥분하고 있는 내게 그 고귀한 검지를 까딱하더니, 멱살을 잡은 내 손을 거칠게 떼어 내고 교실 밖을 유유히 나갔다. 물론 문 한 번 걷어 차주는 건 절대 잊지 않고. 넘어 갈듯 심하게 들썩이는 교실 문을 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야,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따라와' 까지 했으면 아주 완벽할 뻔했다. 아주 완벽히 권상우의 빙의 될 뻔했다. 나는 분풀이로 의자를 걷어차고 팔을 걷어붙이고 그 새끼를 따라나섰다. 씨발, 그래. 오늘이야말로 정식으로 다이 다이 뜨자는 거지? 정말 앞으로 다시는 시비 못 털도록 반 죽여 놓아 줄게.


-


부승관이 멈춘 곳은 5층으로 올라가는 복도 계단이었다. 폐쇄적인 곳이라 복도 청소할 때만 올라오고, 평소 출입이 잦은 곳은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여기서 싸우다간 누구 하나 계단 밑으로 대가리 깨져서 골로 가는 각 나오는데? 다이 뜨자는게 진짜 혼모노 데스매치 하자는 건가? 하! 그렇다고 뺄 이유는 없다. 내 체면에 저 좆만이 하나 못 이겨서 쪽팔리게 먼저 골로 가진 않을 테니까. 나는 여기까지 오면서 실로 오랜만에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중한 각오를 했다. 오늘이야말로 부승관이 죽든, 내가 죽든 이 지긋지긋한 관계의 종지부를 찍겠노라...고.


“니가 했냐?”


내가 각오를 다지고 있는 틈으로 부승관의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온갖 짜증과 혐오가 다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찌푸렸다. 뭐라고? 내 눈에 담긴 부승관은 진심으로 열 받아 미치겠으니 바른대로 다 불라는, 아주 영문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 보라고, 등신아!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거냐며 주변의 동정을 받을 만큼 눈치가 나쁜 나를 위해 부승관의 또 버릇 나쁜 발이 계단 옆의 벽을 뻥 걷어 차주었다. 나는 그제야 부승관의 시선과 발이 동시에 향하고 있는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 씨발 이거 뭐야.”
“야, 좆 팔 놈아. 니가 해놓고 모른 척?”


부승관이 뭐라 하든 말든 나는 경악을 멈추지 못했다. 내 눈앞에는 왜 바로 이걸 발견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 확 들어오는 한쪽 벽을 도배한 낙서들이 펼쳐져 있었다. 낙서를 읽어 내리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2학년 5반 김민규가 2학년 3반 부승관이랑 키스함 ㄹㅇ
 ㄴ ㄹㅇ?
 ㄴ ㅇㅇ내가 직접 봄
 ㄴ아ㅋㅋㅋ미친 게이새끼들ㅋㅋㅋㅋㅋㅋㅋㅋㅈㄴ더럽다
 ㄴ 중딩때 둘이 사귀었다가 깨졌었음 ㄹㅇ썰좀 풀어줄까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정말 놀랍게도, 벽 한 면이 거의 빼곡하게 이런 더럽고 저급한 낙서들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이게 뭐야. 놀란 눈으로 낙서를 읽고 있는 중에도 나답지 않게 우심방 좌심방이 쿵쾅쿵쾅 비트에 맞춰 그루브를 타다가, 저 밑으로 몇 번이고 낙하하고 있었다. 와....나를 항상 따라다니는 ★차도남★존잘남★ 자체발광 폼생폼사 비주얼을 다 죽이고 여과 없이 오픈하며 벌렸었던 입을 천천히 닫았다. 점점 예열되기 시작 작은 분노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크기를 키워 가기 시작했다. 원기옥을 발사할 정도까지 에너지가 모이자, 나도 모르게 아까의 부승관이 그랬듯 벽을 세게 걷어차고 소리를 꽥 질렀다.


“아! 어느 뇌가리 없는 새끼야!!”


미칠 만큼 열 받은 나머지 버릇처럼 입술을 갑자기 세게 깨물었더니, 혀끝에 피 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덕분에 짭조름하게 입안에 퍼지는 익숙한 철 비린내를 그대로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싯적 시멘트로 덮어 버린 빌어먹을 과거의 기억이 저의 존재를 어필하려 들어서, 순식간에 다시 지워 버렸다. 민규야, 아무리 흥분해도 그런 추잡한 흑역사는 소환하지 마라. 나 쪽팔려서 죽는다? 내 안의 내가 환상통처럼 나타나 온몸을 오그라트리며 간절한 충고를 날렸다. 아니, 씨발...내 의지가 아닌데... 그 생각이 먼저 나는걸 어떡해? 그럴거면 첨부터 뇌를 포맷 하고 재부팅 해야 했던 거 아니냐고…. 암튼... 지금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시워언하게 쩌렁! 쩌렁! 모처럼 안 내던 소리까지 질렀는데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은 도무지 가시질 않고 있었다. 엄청 흥분하고 화나더라도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던데, 지금 내가 딱! 그 상태였다. 흥분과 분노로 인해 9.0 진도로 덜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몸은 지금 암울하고 돌덩이 같은 무거운 상황과는 반대로 세상을 여행하는 민들레 홀씨가 된 것 마냥 팔랑팔랑 무게 없이 가벼워져만 갔다. 지금 같은 컨디션은 1대 100으로 몸빵을 하더라도 풍혈 날라차기로 금니 빼고 다 조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정작 위, 아래, 양옆 사정없이 존나 뚜들겨 패야 하는 이 낙서의 주인공을 누군지 모른다는 게 통탄할 일이지만.


아, 대체 누구지? 어떤 새끼지?


 사실은, 정말 현실적으로 보면 이 학교에는 이런 낙서를 할 법한 간 큰 인물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팩트와 결론은 이거. 땅·땅·땅!
그거시…. 왜냐 하면은 말입니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차암 부끄럽고 거시기하다만 이 학교에서 나와 부승관에 맞서서 대적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인소 남주st 서열 0위 반.휘.혈 버금 가는 일쮠 납셨냐고? 허구 소설 안이라고 쎈 척 오져버렸다고? ㄴㄴㄴ 거두절미 하고 그냥 한 가지만 말하자면 나랑 부승관 둘은 중학교때부터 서로 다른 중학교에서 싸움과 주먹 하나로 날고 긴 놈들이란거. 각자 다른 학교에서 다른 구역 땅따먹기 하고 파벌 싸움의 색이 점점 짙어 지고 있을때, 원수 외나무다리에서 재회하듯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났을 뿐이다. 중딩때 나와 부승관이 세운 기록이 미드 왕좌의게임 세계관이랑 견줄 견! 할 정도로 대서사를 이루는데, 과거는 과거니 조용히 묻어 두자.
 
아무튼, 이 학교에서 가장 선과 양극단에 있는 자비리스 인물이 있다면, 나, 아니...그냥 부승관이다. 나는 원래 냉정하고, 잘 생기고, 키는 존나 크고, 딱 보기에도 쌈 쫌 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납득하고 그렇다 하지만, 부승관은 겉보기에는 유들유들~ 만인의 호구, 만만하니 뽕짝에, 끼 좀 부릴 것 같은 귀염상을 장착 하고서는 저보다 한참 큰 새끼들, 나이만 많은 덜 떨어진 선배들을 인정 사정없이 밟고 다닌다고 악명이 아주 높았다. 흠...뭐라더라...어릴때부터 운동을 팠다고 했었나? 소문엔 배구만 몇 년 팠다는 말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운동, 반사 신경은 보통 수준을 넘었고,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아귀힘은 전국 고등학교 탑 클래스도 그냥 찍을 기세다. 또 놀라운 건 작은 고추면서 맷집도 좋다. 부승관에게 사정없이 맞아도 봤고, 사정없이 때리기도 해본 나는 TMI라 치부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 이런 우리 둘을 상대로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던질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다는 것인가? 당사자가 아닌 남들은 우리 둘의 지독한 아귀싸움 구경하며 궁둥이만 겨우 붙이고 있는 처지일 텐데. 나와 부승관을 상대로 선전포고 수준을 넘어, 저딴 유치하고 저급한 낙서로 조롱까지 한 간 큰 사람은 누굴까? 아! 물론 나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부승관이 이런 유치 뽕짝 한 낙서의 범인 일리도 없다…. 혹시라도, 만약 이 부승관 저 빌어 처먹을 싹수 노란 광라리 새끼가 한 짓이면, 나는 정말 부승관을 최상의 서비스를 갖춘 리무진 서비스로 저승길에 모셔다드릴 각오가 되어있다.

 ...그래. 나도 아니고, 부승관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슬슬 몸과 함께 휴대폰 진동 마냥 떨리기 시작하는 주먹을 힘 있게 꽉 쥐었다 풀기만을 반복했다. 또 다시 다른 의문이 들었다.

...아니, 나랑 부승관 말고 누가 또 저 사실을 아는 건데?



“잡아떼고 지랄 났네, 김민규. 네가 한 거잖아.”



.. .무어시라?
 그 와중에 사람 야마 돌게 하는 부승관 특유의 시비질이 또 한 번 내 눈을 까뒤집히게 했다. 안 그래도 지금 빡신 접신이 될랑 말랑 간 보고 있는데, 니가 나 대신 작두를 타주는구나. 나는 본능(빡친다=때린다)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을 들어 부승관의 얼굴을 시원하게 가격했다. 천하의 부승관이면 당연히 손쉽게 피할줄 알았는데, 웬일로 순순히 맞아주고 나가 떨어진 녀석이 금세 재미없게 다시 오뚝이 마냥 우뚝 일어났다. 아 스발, 이래서 부승관을 때리면 맛 대가리 안 나요. 실은 존나 아프면서 안 아픈척 오져 버리니까. 때린 사람 입장 생각해서 아픈 시늉이라도 하는 게 어려운 일이야? 어? 18년 먹고 그런 연기 하나 못하냐고! 고놈의 자존심 잭의 콩 나무보다 높은 거 인정? 어, 인정.

그게 또 괘씸해서 다시 한번 일어난 부승관의 멱살을 쥐고 벽으로 사정없이 몰아붙였더니, 벽에 기대서서 후, 짧은 숨을 뱉으며 크고 날이 선 눈으로 나를 그야말로 존~나 야렸다. 저 반항적인 눈빛을 굳이 해석하자면 '두 번은 안 맞아준다'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때리는 걸 포기해버리는 쫄구는 아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 얼굴을 향해 주먹을 올리려다가, 부승관의 입술 끝에 피가 조그맣게 맺혀 있는걸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멈추어 버렸다. 아……. 시발... 다시 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인 [흑역사님]께서 내 뇌의 중간 자리에 상전처럼 앉으려 하는 걸 느끼며 부랴부랴 의자를 빼버렸다. 부승관은 내가 바보같이 머릿속에서 일어난 2차 대란을 방어하는 틈타 양손으로 자신을 결박하고 있던 나를 세게 밀쳐냈다. 나는 덕분에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호구 같은 새끼.”


어깨를 툭툭 털며 존나 같잖아하는 부승관의 증얼 거림을 똑똑히 내 두 귀로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지구는 둥글다, 만큼이나 아주 쉽고 간단한 이치이자, 만물의 근원과 해답이 되는 공식. 김민규 이꼴 호구 새끼. 그래도 머리를 드미기 시작하는 억울함에 나는 다시 부승관을 향해 또박또박 신경질을 냈다.


“님아, 상식적으로 생각 좀. 내가 이딴 짓을 왜 해? 어느 예쁜 새끼들 흥겹게 딸치라고?”
“여기 이런 낙서 할 만한 새끼가 너 말고 어디 있어?”
“내가 한 게 아니라는데 왜 나한테 물어, 등신아! 안 그래도 야마 빙빙 도는데 좆 털리는 얼빠진 소리나 해대고 지랄이세요. 야. 씨발...알고 보면 니가 하고 모르는 척 하는거 아니냐? 니가 해놓고 입 씻고 나로 모는거 아니냐고? 어?”
“...와…. 내가 너 같은 새끼를 상대로 저런 드러운 낙서에 내 이름 끼워 팔았다고? 구웨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오바 육갑으로 토하는 시늉까지 해 보이는 부승관을 보며 할 말을 잃고 기가 찬웃음을 내뱉었다. 졸라 싹수없는 놈. 부승관은 허리까지 숙이며 열정적이게 임하던 토하는 시늉을 멈추고 뚝. 다시 얼음처럼 그대로 멈춰 서서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낙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존나 아수라 백작이세요? 그때, 그때 표정이랑 분위기가 밤낮 바뀌듯 휙휙 바뀌는 것도 전에도 봐왔지만 낯설다. 덕분에 나도 다시 잠시 잊고 있었던 낙서에 눈이 돌아갔다.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허어, 시발... 첫 시작부터 세상 말세인 문장을 천천히 읽어보다가, 또 열 받아서 육성으로 욕을 걸쭉하게 뱉었다. 참으로 드럽게도 크게 적었고, 글씨는 아주 삐뚤~ 빼뚤~ 적힌 내용만큼 재수 없고, 지렁이가 기어가는 모양이라 더 꼴 보기 싫다. 아니, 기왕 쓸 거면 한석봉 필체로 정갈하게 쓸 수는 없었던 건가? 시조처럼 세로쓰기도 좀 하고. 느낌 알잖아?


“그런다고 저게 없어지냐?”


아직도 의미 없는 벽과의 눈싸움을 하는 부승관에게 인심 쓰듯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었더니, 부승관은 그대로 다시 고개를 홱 돌리더니, 죄 없는 나를 다시 한번 노려보고는 손을 들어 입가에 피를 쓱- 닦았다. 살짝 응고되어 있던 피가 주욱 일선을 만들며 하얀 볼때기까지 살벌한 흔적을 남겼다. 아, 빨간 마스크 얼굴 졸라 무서워. 입 찢어진 것 같아. 정 없는 내 말에 대꾸도 없더니, 부승관은 다시 짧은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진짜 아니냐?”
“아니라고, 시발. 진짜 세상 억울하네.”
“아니라고?”
“한 번만 더 물으면 다이 치자는 걸로 알아들어도 되는 부분?”


 답지 않게 표출하는 짜증과 누가 봐도 초조해하는 녀석의 모습이 낯설지만, 그 모습이 마냥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나와 엮였으니. 무슨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어라. 사실 나 역시도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 부승관이랑 너를 죽이니, 살리니, 하하 호호(라기보다는 살벌하게) 야부리 떨 때가 아니다. 이 낙서를 한 장본인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새끼를 조져야 한다. 나와 생각이 같은 건지 부승관은 낙서를 쳐다보던 걸 멈추고, 갑자기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야, 여기서 피우면 걸려. 원체 남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우리 독고 부 장군이 꺼낸 건, 의외로 담배가 아닌 유성 매직이었다. 매직이 거기서 왜 나와……? 나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지만, 부승관의 친절한 설명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안 해줄 테니까.

부승관은 매직 뚜껑을 열더니 뚜껑을 계단 밑으로 던져 버리고 매직을 오른손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쓸데없이 큰 낙서들에 팔을 넓게 뻗어 엑스 표를 크게 그렸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절제의 미를 아는지 천천히, 그리고 크게 그려지던 엑스 표가, 부승관의 그라데이션 분노가 더 해가면서 굵고 거침없는 의미 없는 선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냥 뒤에서만 봤는데도 부승관이 지금 얼마나 화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과감하게 죽- 죽- 손길 닿는 모양대로 선을 막 그리는 그 동작 하나하나가 렬루 빡쳐 있는게 잘 느껴졌기때문에. 그래서 나는 걍 조용히 아닥션하고 있었다. 쟤는 완전 빡 돌 때 건드리면 인정사정 하나도 안 봐줘서 무섭거든.


“줘 봐.”


부승관이 만든 검은 선들의 광기 넘치고 짜릿한 향연을 방관하다가, 그리는 걸 멈추고 격양된 숨을 고르는 녀석의 옆에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매직 떡칠을 해놨다. 완벽할 정도로 부승관다운 중구난방의 마무리였다. 녀석은 힘이 부쳤는지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게 던지듯 매직을 건넸다. 나는 아마 부승관 키가 좆만 해서 닿지 않았을 거라 예상되는 제일 위에 낙서 '김민규랑 부승관이랑 키스함' 위에 두 줄을 벅벅 그었다. 일회성의 거친 사용으로 수명을 금세 채워 버린 매직의 뭉툭한 끝은 힘아리 없이 팍 접혀 지고, 색은 묻어 나오지 않았다. 얼척이 없어서 허허, 웃었다. 결국 낙서 하나는 지워지지 못하고 남겨졌다. 꼭 남겨진 이 낙서 하나가 조롱당한 우리 꼴을 마지 못하게라도 직시하게 하려는 것 같아서 마냥 저냥 재수 털려서 웃겼다. 수고해준 매직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벽을 향해 세게 던졌다. 벽에 부딪혀서 강하게 튕겨 나온 매직 몸통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다시 계단 밑으로 추락했다.
 

“이거 선전포고 맞지.”
“……”
“이거 적은 새끼 말이야.”


진짜 죽여버릴까. 나는 순간 오싹함을 느끼며 부승관의 이글이글 타기 시작하는 검은 눈을 내려 보았다. 졸라 살벌한 새끼; 예전에 잠시 느꼈었던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이밀어서 좀 헙 했다. 정말 한주먹 거리도 안 돼 보이는 유약한 몸체에 가둬졌던 원초적인 야생 본능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 이 모습을 보니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부승관을 처음 볼 때도 저런 꼴을 하고 있었으니까.


-


18년을 맞아 규부로 연재를 해보려 합니다.
연재텀은 길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정말 배틀호모적 모먼트가 넘쳐나는 글이 될 것 같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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