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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무료하게 시간의 흐름대로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하루 하루 보냈을 뿐인데, 어느새 퇴원일이 성큼 눈 앞으로 다가 왔다. 첫번째 병문안을 다녀간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내비추지 않았던 성지는 퇴원 당일 아침이 밝자 마자 새벽 같이 나의 병실 문을 벌컥 열고 활기차게 들어섰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이미 무뎌진 나에게는 새삼 환멸 같은 부속적인 감정은 고개를 들이 밀지 않았다. 성지가 일찍 찾아 올거란 사실은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에 나는 이미 병원복을 환복한 상태로 성지가 나타나기만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지는 주인을 목숨처럼 받들고 지키는 순순한 충성심 가득한 개를 보는 듯한 기특한 눈빛으로, 아주 흡족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한 걸음씩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는 나와 고집스럽게 눈을 천천히 맞추며 축 늘어진 모양으로 앉아 있는 내 목을 살포시 끌어 안았다.
“그리웠어, 승관아.”
-
퇴원 했으니 집에서 좀 쉬라는 성지의 뜻 밖의 권유로 얼떨결에 바로 떠밀리듯 집으로 돌아왔다가, 한여름에도 사람의 온기가 없어 냉기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집 안 에서 내리 긴 잠을 자고 말았다. 흉흉한 누군가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꿈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눈꺼풀을 힘껏 위로 치켜 뜨고 몸을 급하게 세우며 일어났더니, 나는 거실 쇼파에 이불도 없이 몸만 뉘인 상태로 컴컴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빠져 있는 상태였다. 내가 왜 이러고 있더라? 그대로 백지가 돼 버린 머릿속에서 멍하니 생각을 되짚다가, 아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긴장이 풀려 방안으로 들어 가지도 않고 쇼파에 무작정 몸을 던지며 눈을 감아 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몇 시지?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온 지끈지끈한 편두통을 느끼며, 거실 탁자에 놓여져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홀드 버튼을 꾹 눌렀다. PM 9:22 액정에 떠 있는 시간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허공에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집에 오자 마자 10시간 가까이를 내리 잔 것이다. 그동안 입원 해있던 병원에서 한 일이라고는 그저 숙면 밖에 없었는데... 정말 평생 잘 잠은 병원 안에서 다 잤다고 생각 될 만큼 충분한 잠을 잤는데도, 내 몸은 아직도 휴식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 오니 묘한 안도감 때문인지 또 한 번 이레적인 긴 잠을 자고 말았다. 무슨 기면증 환자도 아니고...
휴대폰을 내려 놓고 불을 켜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가, 문득 꺼지려는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 모양이 떠져 있는 걸 보고 다시 몸을 바로 돌려 앉았다. 문자 라면, 발신인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성지는 항상 내게 문자로 중요한 내용을 전달 하고는 했다. 그 중요한 내용이라 한다면,
「승관아, 잘 잤니?
오장효라는 애가 너랑 싸워보고 싶다해서 알겠다고 했어.
내일 시간 괜찮아?」
주로 이런 패턴.
이것 역시도 씁쓸하지만 예상한 결과였다. 여름 방학이 끝나가고 있는데, 내가 입원하는 바람에 성지는 짜놓았던 모든 계획을 틀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걸로 성지는 내게 강한 보상심리를 내비추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입원 함으로서 자신이 희생해야 했던 수많은 의미없는 시간들에 대한 강한 보상. 나는 메시지를 입력 하기 위해서 다시 화면을 터치 했지만, 막상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 같던 내 손가락은 자판 위를 멍하니 배회하기만 했다. 문자를 다시 한 번 읽는 순간, 갑자기 지난번 맞았던 모든 곳들이 다시금 욱씬 욱씬거리며 내 몸 깊숙한 곳 까지 고통 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나는 침을 꿀꺽, 소리나게 삼키며 빠른 손놀림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아니 나 아직 몸이 회복이 덜 돼서 내일은 무리야.」
그리고, 작은 액정 화면에 글자로나마 정갈하게 배열 된 내 복잡한 진심을 입 밖으로 조용히 내뱉어 보았다.
아니, 나 아직 몸이 회복이 덜 돼서 내일은 무리야.
입꼬리가 미약하게 넘실넘실 올라갔다가, 금세 볼품 없이 밑으로 늘어져 버렸다. 이런 말을 적을 수 있을리가 없는데, 혹여 다른 미련이 들까봐 지우기 버튼을 다시 빠르게 눌렀다.
아니, 나 아직 몸이 회복이 덜 돼서 내일은 무리야.
입꼬리가 미약하게 넘실넘실 올라갔다가, 금세 볼품 없이 밑으로 늘어져 버렸다. 이런 말을 적을 수 있을리가 없는데, 혹여 다른 미련이 들까봐 지우기 버튼을 다시 빠르게 눌렀다.
「응. 몇 시에?」
그래. 거부할 수 있을리가 없다. 성지가 가지고 있는 보상심리를 충족 시켜줘야 하는 그 주체는 바로 나다. 아프다는 나약한 핑계를 대고 그 허물을 무책임하게 벗어 던질 수 있을리가 없다. 여기서 망설이면 혹여 나를 괴롭힐 아쉬움이 남을까, 더욱 급하게 전송 버튼을 누르고 다시 쇼파에 멍하게 몸을 그대로 뉘었다.
내가 잘 싸울 수 있을까?
미련의 조각 조차 남지 않은 바보같이 멍한 머릿속이 두려워서, 새삼 쓸모없는 걱정을 해보았다. 잘 싸울 수 있을리가 없지. 그 무용한 걱정을 이어, 현실적인 대답이 당연한 듯 뒤따라 왔다. 아마 제 3자가 싸우다 다쳐서 입원하고 퇴원 한지 단 하루만에 다시 싸움을 하러 간다 하는 내 모습을 본다면... 왜 저렇게 한심하게 싸움꾼처럼 모든 일에 불 붙이고 전투적으로 사는지 이해 하지 못하며 나를 향해 손가락 질 할 것이다. 나는 괜히 쇼파 위에 놓여진 베개를 꽉 끌어 안았다.
... 지금 내 모습을 김민규가 본 다면 어떨까? 김민규가 지금 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제 3자에서 김민규로 생각이 전환 된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 앞에 끝 없이 펼쳐진 어둠을 도화지 삼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김민규의 써늘한 표정을 그려 보았다. 빈틈 없이 냉정함만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그 얼굴이, 오롯이 나를 향해 그저 아이가 되어 스르르 녹아 지던 그 순간들도 떠올려 보았다. 그게 억누르고 있던 김민규에 대한 모종의 그리움의 신호탄 이라도 된 듯, 물 밀듯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김민규가 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매번 내쳐지면서도 꿋꿋하게 내 손을 잡던 그 뜨겁고, 차갑고, 미지근했던 다양한 온도의 손. 뒤에서 나를 끌어안던 너무나 어른 같았던 그 넓은 품, 나를 위해 매번 서툰 솜씨로 매일 같이 라면을 끓이고, 볶음밥을 하고, 편의점에서 음식을 사다 나르던 묘하게 헌신적이었던 모습도, 내가 싸움을 하고 난 뒤에 마주하게 되는 날 마다 캐묻지 못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지던 얼굴도, 틈만 나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흘금, 관찰하던 근심 가득한 시선도, 눈을 먼저 감고 나를 향해 정확하게 고개를 숙이며 익숙하고 키스하던 그 모습도...
김민규와 함께 했던 모든 짧은 순간들을 뒤지고 난 뒤에는, 마지막으로 그 날 병실에서 보았던 김민규가 선연히 떠올랐다. 나는 그때의 김민규의 얼굴에 새겨진 깊은 사색을 잊을 수 없다. 아직도, 아직도 자꾸만 나를 떠나가던 김민규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필사적으로 자신 내치려는 나를 향한 원망과, 결국은 물러설 수 밖에 없다는 패배감과, 그로 인한 허탈함이 짙게 깔린 감정을 숨기고, 잘 지내라는 한 마디로 지겨운 게임의 끝을 내버리던 그 뒷모습이. 결국, 김민규는 끝내 내게 기브업을 고했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멎지 않는 휴대폰의 작은 진동이 김민규로 가득 채워져 있는 나를 다급하게 깨웠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발신인은, 김민규 였다.
내가 네 생각하는거 알고 전화 한거냐?
전화를 받아 물어보고 싶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김민규가 이 귀신 같은 타이밍에 또 다시 내게 전화를 하다니.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감히 고민하고 망설임 틈 조차도 주지 않겠다는 듯, 휴대폰 진동은 나를 재촉하듯 끊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수신 버튼을 누르고, 조용히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던 수화기 너머에서 김민규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야, 부승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가만히 침묵을 유지 하다가, 입을 열었다.
“…… 너, 연락 안하겠다며.”
- 이게 진짜 마지막이야. 지금 당장 우리집 앞으로 와.
김민규는 동요 없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지만, 이상하게 화를 참고 있는 듯, 글자 하나 하나 꾹 눌러 담은듯한 어조 였다. 나는 대답 없이 침묵을 고수 했다. 침묵을 용인하지 않는 김민규는 다시 말했다,
- 마지막이라도 협박은 협박인거 알지. 헤이하게 굴지마라. 기다릴게.
뚝.
나는 비정하게 끊어진 전화기를 바닥에 던지듯 놓았다. 김민규 너는 진짜 뭘 몰라.
이제 굳이 그런 협박 하지 않아도 그냥 네가 부르면 내 몸이 자동적으로 너한테 가버리는데.
이제 굳이 그런 협박 하지 않아도 그냥 네가 부르면 내 몸이 자동적으로 너한테 가버리는데.
-
김민규네 집 놀이터에 도착 하니, 저만치서 익숙한 실루엣이 그네에 앉아 있는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김민규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은 다리가 완전히 회복 되지는 않아서, 살짝 절룩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걸 티를 냈다간 김민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한 일이었다. 그걸 의식하고 온전하게 걸어 보려 했지만, 되려 걸음걸이가 어정쩡 해지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평소에서 속도만 조금 늦추어서 김민규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그네에 앉아 있던 김민규가 내 기척을 느낀건지 고개를 홱 돌리고는, 나를 발견하자 마자 그네에서 벌떡 일어 났다. 가로등의 어두운 주황 빛을 얼굴에 그대로 쐬고 있는 김민규의 얼굴은, 보름 전에 봤던것 보다도 더 눈에 띄게 상해 있었다. 예전에도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척박하고, 거칠어 보이지는 않았는데...아무리 그래도, 김민규가 저렇게 변한 것이 누구도 아닌 나 때문일 거라는 그 무거운 책임 만은 회피 하고 싶었다.
김민규 역시도 나를 보며, 그 순식간에 표정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가지각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김민규가 판단 하기에도 내 상태가 어진간히 좋지 않아 보인 모양이었다. 결국 종국에는 원점인 화난 듯한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김민규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용건 있음 빨리 말 해.”
“너, 내일 오장효랑 싸우냐?”
“아, 또 어디서 주워 들어가지고.”
김민규는 나를 똑바로 내려보며 물었다. 맥이 탁 풀렸다. 진짜 소문은 어디서 이렇게 잘 주워 듣고 오는건지 알 수 없다. 나는 일부러 짜증스레 대답했다. 김민규는 내 반응에 굴하지 않고 짧은 한숨을 내뱉더니, 손을 들어 내 어깨를 똑바로 고정해서 잡았다.
“가지마. 너 지금 그 상태로 가면 또 병원행이야.”
마주 본 김민규의 표정과 내뱉는 말은 걱정,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내가 걱정돼서 미치겠다는 그 표정이 이제 나한테는 거부스러웠다. 자꾸 정도를 넘잖아, 김민규. 이제 연락 안 한다며. 잘 지내라며. 그냥 뒤돌아 갔으면서 왜 아직도 내 걱정을 떨쳐 내지 못해? 왜 항상 나한테 그렇게 티를 내냐? 걱정 돼서 미치겠으면 너 혼자 그냥 미쳐 버리던지, 접싯물에 코를 박던지, 알아서 네 스스로 그 감정을 조절 하란 말이야. 날 굳이 네 안중에 끌어 들이려 하지 말라고. 네 그 행동 하나 하나가 그냥 이런 무의미한 싸움에 무뎌진 나를 불안하게 하는지 아직도 몰라? 나를 걱정 하면서 너의 그 행동 하나 하나가 나를 더 목 매이게 한다는 걸...너는 왜 몰라, 대체 왜...
나는 내 어깨를 꽉 쥐고 있는 김민규의 손을 거세게 떨쳐 내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하, 너 진짜. 나한테 왜이래? 씨발 내가 뭐 그리 큰 죄졌냐? 키스한거, 그게 존나 아니꼬와서 지랄 하는 거면, 그래, 이제는 성지한테 꼬바르던지, 성추행죄로 신고 넣던지 쪼대로 해, 새끼야. 내가 이때까지 장단 맞춰 주니까 웃기지? 만만하지? 어?!”
순간적인 분에 사로 잡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깊숙한 곳에서 혼자 삭이고 있던 화를 덜컥 주의없이 내뱉고 말았다. 김민규는 아까 보다 조금은 멍하고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마주 보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고, 김민규의 표정은 삽시간 허탈함에 젖어 갔다. 걱정해주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떨쳐 내려 애쓰는 내가 놀라 웠을 것이다. 잠시나마 다시 찾아온 이제는 익숙한 정적이 우리 둘 사이의 공간을 채워갔다. 침묵으로 시종 될 것 같았던 대화는 김민규가 다시 깨트렸다.
“한성지 때문이지.”
“...뭐?”
“너 싸움하는거 전부, 한성지 때문 아니냐고.”
“...뭐?”
“너 싸움하는거 전부, 한성지 때문 아니냐고.”
순간 우리 둘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찬바람이 휘몰아 치는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을 누군가 맨 손으로 짓누르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무어라 입을 떼지 못했다. 김민규는 오늘 끝장을 볼 각오로 온게 분명하다. 오늘만은 내가 감추려 해도 눈 감고 쉬이 넘어갈 요량으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김민규라는 존재가 다시 한 번 두려웠다. 김민규가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은 이미 내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 아니지만, 나를 뿌리칠 수도 없이 파고드는 집요함을 가진 김민규가 두려웠다. 어쩌다 너는... 김민규, 너는 진짜...어디까지 나를 네 독단의 판단으로 몰아 세울건지.
“김민규, 너는 항상... 하나도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 말해.”
“......”
“그래서 미치도록 싫어.”
“......”
“마지막이라는 약속 지켜. 다시는 연락 하지마.”
나는 그 말이 끝나고 김민규를 다시 올려 보았다. 일그러지는 김민규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입에서 맴도는 다른 말들은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민규가 알고 있는건 단편적인 쓸모 없는 사실 뿐이다. 김민규는 내가 왜 성지에게 거의 주종 관계로 복종하며 싸움을 하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단순히 1차원 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김민규는 내 과거와 트라우마를 모르니까. 내가 얼마나 비겁한 새끼였는지, 겁쟁이고, 얼마나 야비한 놈이었는지 하나도 모르니까. 나는 시야를 가리는 과거의 잔상에 눈을 꽉 감았다 뜨며 김민규를 등지고 뒤 돌았다. 바람 하나에도 쓰러질 것 처럼 과하게 심장이 달리기 시작했다.
“가지마.”
뒤도 안 돌아 보고 한 순간 이라도 빨리 김민규의 눈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는데, 아이러니하게 나를 붙잡는 그 간절한 한 마디에 발에 족쇄가 채워진 듯 다시 한 번 뚝, 걸음이 절로 멈췄다.
“...제발!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 하잖아.”
처음 들어 보는 김민규의 목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춘 상태로 김민규를 돌아 보았다. 초조함을 내비추고 있는 김민규는, 눈가가 젖어 있는 듯한 착각 마저 들게 하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내 앞으로 다시 다가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김민규 같은 애가 나를 위해서 자존심까지 눕혀가며 이렇게까지 하는건지. 나는 멈춰 서있는 상태로 김민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번에야 말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말해야 할 시점이다.
“김민규. 나는...정말 너를 모르겠다. 네 생각을 모르겠어. 나한테 왜 이러는지도, ”
“...모르겠다고.”
김민규의 표정은 단숨에 확 식었다. 차가운 눈빛에 그대로 얼어 버릴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꽤 흔들림 없이 김민규를 마주보았다. 김민규는 내게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왜? 분명 내게 이러는 확실한 이유가 존재할텐데 그 이유는 적당히 숨기고 내가 물러날만한 반응만 내보이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들어야 한다. 너에게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그렇게 가지고 있던 여유까지 잃어가며 나를 챙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김민규는 대답 대신 내게 한 걸음씩 더 다가 왔다. 가로등을 등진 얼굴이 어둠에 휩싸였지만, 이상하게 김민규의 묘한 긴장감 가득한 표정만은 또렷하게 잘 보였다.
“왜 오늘은 안 묻냐?”
“..뭘?”
“너 나 좋아하지 라고.”
바쁘게 돌아가던 머리회전이 순간 이어진 김민규 한 마디에 뚝 멈췄다.
“좋아하는거 맞아.”
무슨......
김민규는 눈에 띄게 당황한 무방비 상태인 내게 다가와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나는 들이 마신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그저 가까워진 거리에, 본능적으로 뒷걸음 치고 말았다. 내 손을 꽉 잡고 있는 손은 김민규의 어려운 각오를 대변이라도 하듯, 이미 식은 땀으로 흥건했다.
“네 말대로 이제 다시는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이제 한성지 빌미로 협박도 안 할거고, 아예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는거, 그거 좋아. 그렇게 할게. 다른건 다 양보할 수 있는데, 너 내일 싸움하러 가는 거. 그거는 제발...제발... 가지마.”
가지마, 라는 그 마지막 한 마디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김민규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누가봐도 애원 하는 듯한 깊은 눈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내가 뱉어낼 지독스레 이기적일 대답을 유도 하고 있었다.
나는 하얘진 머릿속에 지금의 상황을 하나 하나 입력했다.
김민규가 내게 좋아 한다 고백했고, 그 고백으로 나를 붙잡고 있다. 김민규가 했던 모든 행동과 말들은 요란하고 특별한 이유가 존재 하지 않았다. 정말 흔해빠진, 미사어구 조차 덧붙일 필요가 없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냥 나를 좋아 했을 뿐이다. 어쩌면 나도 의레 짐작 했을 수도 있는 그 단순함이 결국은 날 속박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어 내 손을 잡은 김민규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 보다가 내 손을 겹쳐서 꽉 잡았다.
“왜 성지가 널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
“너랑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김민규는 천편일률적인 공식으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는 김민규가 가진 솔직함에 매번 놀라게 된다. 현실이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지 쉽게 뿌리치고,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그렇다, 이렇다 가식 없이 표현 해내고,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묘하게 틀어 놓는 것도 샘이 날 정도로 부러웠다. 남자라면 다 노리개 취급하던 성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움직인 건, 비단 김민규의 잘난 외모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성지는 김민규의 이런 모습을 한 눈에 파악했기 때문에 끌린 것이다. 그 사실을 사무칠 정도로 깨닫게 되었다.
나는 동공이 심하게 울렁 거리고 있는 김민규의 목을 끌어 당기고, 첫만남 이후 수없이도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던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 자존심 강하고 굳센 너를 이렇게 까지 만든게 보잘 것 없는 나라는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너도 느끼고 있겠지. 너랑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성지가 불렀을때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분에 사로 잡혀 괜한 네게 키스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가 날 좋아하게 될만한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입맞춤 후에 김민규를 똑바로 올려 보았다. 김민규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도, 나는 변할 수 없다.
“고마워.”
“......”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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