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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김민규는 나를 자신의 동네로 자주 불러 내었다. 내가 반항이라도 할라 치면 당연한듯, 성지라는 히든카드를 꺼내 거부하지 못하도록 수를 쓰는건 당연했다. 그러는 김민규의 모습이 어쩌면 성지처럼 나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괴로운 요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김민규와 만나는 것이 내가 생각 하는 만큼 크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의외로 김민규는 성지와는 다르게 내게 별다르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워낙 부를 때마다 성격대로 성질을 부려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만나면 별 이렇다 할 대화나 인사도 없이 키스만 하고, 잠시 동안 나를 보다가 바로 집으로 보내 주는게 전부 였다. 나는 의중을 알 수 없는 김민규의 행동에 안도 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 하기도 했다. 키스를 할 때마다 내 등허리를 마치 연인처럼 조심스레 껴안고 만지는 김민규의 행동은 면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천하의 김민규가 여자가 궁해서 꿩 대신 닭 경으로 나를 만나는건 아닐 거고, 양아치 치고는 결코 다른 놈들 처럼 가볍지 않은 김민규 천부적인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단순히 나를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수단도 아닐 것이다. 김민규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함이 쌓여 가는 새로운 날들이 하나, 둘 그 수를 더 해가고 있었다.


“또 맞았냐?”
“누가 맞았대.”
“지금 네 꼴이 맞은 꼴이 아니면 대체 뭔데.”
“조용히 해. 머리아파.”


공교롭게도 그 날은 학교 안에서 시비가 걸려서 싸움을 하고 온 기분이 아주 더러운 날 이었다. 주로 방과 후 마다 싸움판을 짜서 나를 그 안에 밀어 넣고 있는 성지는 초장 부터 얼굴이 다 뭉개진 내 꼴을 보더니, 가끔 드러내는 측은한 마음이라도 생긴 건지, 별 말 없이 오늘은 학원 때문에 먼저 가보겠다며 방과 후에 인사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딱 맞춰 이번엔 귀신 같이 김민규가 나를 불렀다. 오늘 성지랑 약속 있어서 안 돼. 모처럼 찾은 자유를 너그럽게 만끽하며 집으로 가기 위해 그럴 듯한 거짓말을 문자창 에다 빠르게 입력 하다가, '오늘 성지랑...' 까지만 쓰고 결국 지워 버리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정말 날이 갈수록 내 정신이 미쳐 가고 있는 건지... 김민규에게 가는 것이 썩 거부감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동안 싸움 좀 하고 다니느라, 만나자고 컨텍 하는 걸 모두 거부해서 김민규도 슬슬 짜증이 치밀랑 말랑 입질 오는 타이밍 일테니까. 누구를 위한 합리화인지 모를 생각으로 나는 자유와 김민규 중, 결국 이끌리듯 김민규를 선택했다.

 익숙한 경상의 고통으로 뻐근한 몸을 이끌고 늘 만나는 약속 장소인 김민규의 아파트 앞 놀이터 까지 갔더니, 나보다 간발의 차이로 늦게 등장한 김민규는 내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피죽이 된 내 얼굴을 한손으로 쥐며 요리조리 살피더니, 대뜸 인상부터 팍 찌푸리며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미간이 잔뜩 좁혀진 잘난 얼굴을 올려 보다가, 나도 모르게 몸에 베인 무성의한 꼬락서니의 대답이 툭 튀어 나왔다. 김민규의 긴 한숨 소리가 다시금 그 공간을 채웠다.

...걱정하는 건가?
가방을 내팽겨치듯 모바닥에 던져 버리고 내 앞에 철푸덕, 앉아서 말 없이 나를 올려다 보는 김민규의 표정은 처음보는 사색에 깊이 잠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싸움을 하고 난 바로 다음날 한 번 만났을때도, 이런 비슷 비슷한 표정들을 여러번 목격한 것 같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걱정을 네가 왜 해? 그건 네가 할 필요 없잖아.
나는 목구멍에 차오르는 차가운 언어들을 삼키고, 나 답지 않게 그저 김민규를 조용히 내려다 보았다. 해가 지고 있는 배경에, 분명 오롯이 나 하나 때문에 한 없이 어두워지고 있는 김민규의 눈빛을 바로 마주 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 한켠의 저릿 저릿한 고통과 동시에 묘한 희열감이 어기치며 온 몸으로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빨라지는 박동의 심장 소리를 감추려 손이 하얘질 정도록 녹슨 그네줄을 꽉 쥐고, 숙였던 고개를 올리고 말했다.


“할 거면 빨리 하고 끝내자. 피곤해.”


그냥 평소처럼, 김민규가 하는 키스에 응하고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오늘의 김민규는, 나에 대한 걱정과 은연중에 무섭도록 흘리고 있는 화를 그대로 품고 있는듯한 김민규는, 나를 손쉽게 보내 주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야. 배 안 고프냐.”
“...안 고픈데.”
“우리집에서 뭐 좀 먹고 가.”


한참을 침묵 하며 모래 바닥에 앉아 있던 김민규가 뜬금 없는 말을 던지며 무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내 예상을 묘하게 빗나가는 김민규의 반응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 하나라도 당장 때려 죽일수 있을 듯한 섬짓한 살기와 성질을 감추지도 못하면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밥 먹고 가라는, 얼핏 들으면 평범하고 상투적인 말이라니. 나는 도대체 그 괴리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나는 아까의 김민규가 그랬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필요 없고, 피곤하니까 빨리 하고 끝내자고.”


그냥, 평소처럼 해 김민규. 넌 선 넘는짓 하지마. 자꾸만 그렇게 화난 표정도 짓지 말고, 걱정하는 모습도 보이지 말고, 자꾸 이리저리 파고 들면서 자리 잡으려 하지마, 제발.
내 간절한 마음과 다르게, 김민규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모양새가 할 말은 많은데 쉽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민규는 종종 저럴때가 있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몰라서 수많은 갈등의 시간을 드러내는 정적을 보일 때가 있다. 내 앞에서 많은걸 억누르는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을 나는 참지 못한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저 분위기에 말려 들어가는 내 모습도 참지 못하겠다.


“뭐 맛있는거 해줄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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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는 집으로 들어 오자마자, 가방도 벗지 않고 분주하게 거실과 주방을 쏘다니며 식재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선반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제서야 남의 집에 들어와서 정승 마냥 현관 앞에서 뻘쭘하게 서있는 나를 발견했는지 정면의 왼쪽 방을 고갯짓으로 가르켰다. 내 방 안에 들어 가있어. 김민규가 답지 않게 허둥 대는 걸 멀뚱히 구경 하는 것도 재미 있는 꼴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저항없이 김민규의 말대로 순순히 김민규의 방에 들어갔다.


“…엄청 더럽네.”


문을 닫으니 내 방과 별 다를게 없는 전형적인 남고생의 방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  아침에 일어난 모양새 그대로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불과, 발 끝까지 채이는 옷가지들을 보며 실로 오랜만에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또 아이러니하게 또 책상은 뭐하나 올려진 것 없이 깨끗하다. 공부를 안 하니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책장에는 대부분 만화책이었지난, 아닌 일반 소설책이나, 문제집 비스무리한 책들도 간혹 몇 권씩 끼워져 있었다. 저걸 다 읽기는 했을까 실로 의문이 들었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김민규도 책이나 공부와는 꽤 거리가 먼 인물일 테니까.
 좁은 방을 둘러 보는것은 그만 두고 나는 그나마 깨끗한 책상 쪽에 의자를 당겨 머리를 두고 자연스레 엎드렸다. 가깝게 닿은 책상 원목 특유의 나무 냄새가 코 끝을 스쳤다. 왠지 모를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평소에는 기대도 안 했던 모처럼의 고요한 일상이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걸 누구도 아닌 김민규의 집에서 느끼고 있는게 정말 아이러니하지만.......

…그리고 그 짧은 새에 잠시간 잠이 들었나보다. 저만치서 내 이름을 부르는 김민규의 큰 목소리에 나는 다시 번뜩 눈을 뜨고 몸을 바로 일으켰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졸았다는 생각이 들자 마자, 생소한 감정이 들었다. 언제나 경계해야 할 김민규 옆에서 나는 자꾸만 마음을 놓아 가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아직도 졸음에 비척대며 방에서 나왔더니, 김민규는 익숙한 모양새로 식탁 위에 수저를 놓고 있었다. 얼마나 좋은걸 해줄까 라는 기대 조차도 전혀 하지 않았다만, 막상 거실에 진동 하는 라면 냄새를 맡고 나니 기가 막혔다. 뭘 해줄 것처럼 호기롭게 데려와 놓고 결국 라면이라니. 김민규 본인도 민망했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상태로 와서 먹으라는 말만 로봇처럼 반복 했다. 자세히 보니 귀 끝이 살짝 붉어진것이, 저 나름 창피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덩치도 커다란게, 의외인 부분에서 남 눈치를 보는게 웃겨서 다시 한 번 치밀어 오르려 하는 웃음을 삼키고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내 앞에 있는 냄비에는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라면이 한 가득 맛있게 담겨져 있었다.


“좀 먹고 다녀. 졸라 비실 비실 해가지고.”
“......”
“그리고 처맞고 다니지 좀 마라. 명색이 광라리 꼴에.”


그릇에다가 라면을 듬뿍 퍼서 내 앞에다가 놓으며 김민규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젓가락을 든 채 김민규를 쳐다 보았다. 최대한 나한테 하는 간섭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많은 조미료를 뺀 말처럼 느껴졌다. 펄펄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 속에서 라면을 퍼고 있는 김민규의 갈색 앞머리칼은 이미 땀에 살짝 젖어 있는 상태였다. 나는 김민규와 눈이 마주칠까 싶어서 다시 바닥으로 눈을 급하게 떨어트리며 말했다. 야, 내가 이 정도로 처 맞았으면 걔네는 어찌 됐겠냐? 내 말에 김민규는 아, 라는 바보 같은 의성어를 내뱉으며 깨달음을 얻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또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이유는, 오늘은 김민규 역시도 평범하고, 바보같아서.


“근데. 너는 누구랑 그렇게 싸움을 하고 다니냐? 학교 애들?”
“먹는데 말 시키지마.”


사실 그렇게 입맛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다소 깨작 깨작 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무슨 물가에 내놓은 어린이 보듯 초조하게 바라보던 녀석이, 결국은 그 원초적인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김민규는 대체 내가 왜, 누구랑 싸움을 그렇게 매일 같이 하고 다니며 얻어 터져 오는지 궁금한 것이다. 김민규 본인은 알 필요도 없고, 쉽게 예측할 수도 없는 문제. 하지만 김민규는 성지의 실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연관지어서 생각한다면, 정답에 가깝게 도달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김민규가 나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들이 밀때마다 매정하게 선을 그어 거절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이상 제 3자인 김민규를 우리 관계에 개입시키고 싶지 않다. 지금 이렇게 밀회식으로 만나는 것도 눈치빠른 성지한테 혹시라도 들킬까봐 얼마나 조마조마 한지 모를거다.
내 쌀쌀 맞은 대답에 김민규의 얼굴에는 살짝 실망한 낯빛이 스쳤다. 이만큼 무안 줬으면 여기까지 끌고 왔어도 더이상 아무 말도 걸지 않겠지, 예상을 했는데 김민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 쎈 척에, 허세 개 오지는거 알지.”
“......”
“존나 싸가지는 국밥에 말아 처먹은 대쪽같은 성격에, 매사에 폭력적이고.”


…갑자기 뭐지, 싸우자는건가. 나는 라면을 먹다 말고 한짝 눈썹을 올렸다. 자신이 느꼈을 내 성격을 평가하고 있는 김민규는 아까의 낯빛은 싹 지운채 지금은 누구보다 의기양양하게 바뀌어 있었다. 김민규 주제에 내 성격이 쎈 척하니, 싸가지 없니 이런 말을 한다고? 나는 살짝 열이 받아서 대꾸 했다. 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거든. 유치할 법한 대화는 사절하고 싶었는데 김민규의 말에 나오는 대꾸는 결국 유치할 수 밖에 없었다. 김민규는 내 대답에 회심을 잡았다는 미소로 다시 말했다.


“근데. 하나도 안 무서워, 너.”
“그것 역시 너도 마찬가지거든?”
“귀여워.”
“아, 그니까 너도 마찬가지ㄹ... 뭐라고?”


내 귀를 의심 했다. 지금 귀엽다고 한 건가, 저 새끼. 난생 처음 들어 보는 말에 대한 큰 거부감과 동시에 폭발적인 짜증이 밀려 왔다. 김민규는 내 반응을 재미있다는듯 관찰했다. 이 새끼는 사람 놀려 먹는 것도 상대 봐가면서 해야지.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세웠다.


“야. 너 젓가락에 눈알 꽂혀봤냐?”
“아니.”
“꽂히고 싶냐?”
“싫은데?”


나는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김민규 쪽으로 던지며 소리쳤다. 밥맛 떨어지게 어디서 좆같은 소리를 해대, 씨발! 바닥을 향해 날라간 젓가락이 세게 떨어지자, 김민규는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낯간지러운 말에 붉어지려는 얼굴을 숙이고 분을 삭였다. 괜히 오늘 김민규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탁 밑에서 떨어진 젓가락을 주워 식탁 위에 올려 두던 김민규가 입가를 시원하게 올려 웃은 채로 날 보았다. 그러고 보니, 김민규가 내 앞에서 저렇게 신나서 웃는건 처음이다. 그게 그렇게 즐거운 건가.


“근데 장난 아니고 진짜 귀여워.”


그러든 말든, 좆같은건 변하지 않는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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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의 놀림와 찝찝함만 남은 라면을 먹고, 후식으로 꽁꽁 얼은 아이스크림도 얻어 먹고 난 뒤에야 김민규는 자리를 정리하며,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찾아서 양손에 끼웠다. 그래도 나름 얻어 먹은 것도 있으니 설거지는 내가 할까 싶었는데, 주저 없이 본인이 나서는 걸 보고 나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김민규는 물을 틀면서 나를 돌아 보았다. 집에 갈래? 가방을 챙기고 있는 나를 보며 물었지만, 나는 쉽게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따뜻한 김민규의 집에 조금 더 남아서 쉬고 싶기도 했지만, 김민규의 눈빛에 대놓고 아쉬움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는 조금 이상했다. 평소에 나라면 김민규의 속 뜻이 어떻든 묵살만 했는데, 김민규가 키스를 하고 난 뒤에 나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열망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보아도, 난 그냥 무시하고 매정하게 가방만 챙기고 떠났는데… 나는 가방을 다시 내려 놓으며 김민규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김민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이번에는 그게 그만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시 들어온 김민규의 방에서 이번에는 제법 익숙하게 책상 의자를 찾아 앉았다. 분명 겉보기에는 더러운 방인데, 방안에서는 강한 라벤더 향이 나서 의아 했었는데, 책꽂이 빈 공간에 큼직한 디퓨저도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은근히 섬세 하네. 나는 멍하니 손을 들어 디퓨저 안에 들어 있는 말라 빠진 꽂을 만지작 거리다가 엎드렸다.

좋다. 이런게 평범한 건가?

 오랜만에 찾아온 평범한 일상에 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김민규 집에 온 순간 부터 이상하게 성지 생각이 많이 나지 않았다. 내 생각중 언제나 중간 자리를 차지 해서 잊을만 하면 생각 나는 그 존재가 오늘은 묻혀버렸다. 평범하게 졸고, 라면을 먹고,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승과, 패와, 상처만 있는 싸움과는 느낌이 현저히 달랐다. 나의 방과 후는 언제나 싸움 혹은 술자리로 얼룩져 있었다. 나 때문에 서로의 사이가 더욱 멀어지신 부모님은 1년 전 부터 별거 중이시고, 나는 나를 거의 포기하시다시피 한 아빠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집안의 간섭 조차, 걱정 조차 받지 않는 신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항상 위태한 일탈과 성지의 지배 속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평범한 일상을 뒤로 한 채...

문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귀에 잔잔히 들리던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도 멈추어져 있었다.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엎드린채 눈을 감았다.


“야, 곧 엄마 오시는데 너 집에 ㄱ...”


김민규의 말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일어 날까, 했는데 내게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리자 이상하게도 꼼짝할 수 없었다. 바로 내 앞에 앉은 듯한 김민규의 시선이 눈을 감고 있어도 느껴졌다. 따뜻한 숨결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민규의 큰 손이 내 얼굴을 반쯤 가린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 주기 시작했다. 손은 투박한데 마치 애기 다루는 듯한 가벼운 손짓이었다. 나는 또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지는걸 느꼈다. 이상하다, 김민규는 항상.


“...너 진짜 호모새끼지.”

 
나지막하게 증얼 거리며 눈을 떴다. 암순응을 끝내며 차츰 밝아지는 내 시야에 당황하며 손을 거둬 내는 김민규가 보였다. 나는 김민규의 눈을 쳐다 보았다. 항상 날 볼때마다 다양한 감정들이 녹여져 있는 김민규의 눈을. 언제나 그랬듯 김민규 역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살짝 웃음기 흘린 목소리로 엎드렸던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왜 쳐다봐.”


내 물음에 김민규는 나를 똑바로 쳐다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올라가 있는 잘난 입꼬리가 보기 좋은 모양새를 만들어 내며 긴장돼 있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누구보다 잘생긴 녀석의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잘 생겼다, 김민규. 하마터면 그렇게 서둘러 말 할뻔했다.


“신기해서.”
“뭐가?”
“지금 되게 평범 해보여.”


내 속내를 뚫어 보는듯한 김민규의 말에 놀라서 나는 김민규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나와 다른 사람.


“신기하네.”
“뭐가?”
“나도 지금 내가 되게 평범하다고 느꼈거든.”


몰랐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오늘 정말 김민규를 선택하고 여기까지 온 건, 현명한 선택이었나보다. 쉽사리 경험할 수 없는 일상을 나눈다는 것. 그걸 선사 해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김민규라 할지라도 웃음이 감춰지지 않을 정도로, 이런 내가 서글플 정도로 기분이 좋다.


“너는 평범한게 좋냐?”


김민규는 나를 향해 물었다. 평범한게 좋냐고? 내가 만약 진아, 성지, 김민규 너를 부딪지 않고 평범하게 자라 왔다면 어땠을까? 지금 보다 행복했을까? 아니, 그건 그렇게 내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았을 거야. 이 일상이 사라짐으로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들도 있었을테니까. 또 난 지금보다 약하고, 겁쟁이 처럼 누가 내 앞에 나타나더라도 섣불리 타협하고 살았을테니까. 그럼 난 또 제 2의 진아, 제 2의 성지를 찾게 될지도 몰라.


“아니.”
“......”
“평범하면 지금보다 약하잖아.”

 
그리고 오늘처럼, 김민규 네가 너네 집에 날 초대해줄 일도 없었을테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사사로운 행복도 일상의 익숙함에 찌들어서 느끼지 못했을테니까. 난 현재로 만족하지 않아도 만족할 수 밖에 없어.
김민규는 별 다른 대꾸 없이 무표정으로 살짝 일어선채, 상체를 숙이고 내 뒷목을 왼손으로 가볍게 감싸 안았다. 내 눈 앞에 정면으로 보이는 김민규의 잘 뻗은 콧대와, 흔들림 없는 갈망에 젖은 눈동자를 바라 보다가 자연스럽게 눈을 스르르 감았다. 항상 키스를 할 때마다 갈 곳을 잃은 채 가만히 방치했던 내 양팔로 김민규를 감싸 안아 주았다. 순간 김민규의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내 조급함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의무로만 느껴졌던 그 키스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날이었다.

그 날은 많은걸 바뀌게 했다. 김민규에 대한 내 견해 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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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자격증 시험이 있어서 당분간 연재가 어렵습니다.
다시 또 뵈어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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