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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여름 방학이지?
담배를 태우며 반쯤이나 감고 있던 눈을 살짝 열었다. 조금씩 밝아져 오기 시작하는 시야에, 오후의 햇살을 조명처럼 받아 유난히 더 하얗고, 금세라도 하늘로 오를듯한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고 있는 성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계절 중 제일 싫어하는 초여름의 습하고, 더운 날씨에도 곧 방학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건지, 단조로운 음의 나즈막한 콧노래를 부르며 사뿐한 발걸음으로 그 자리에 못 박은듯 서 있는 나를 지나쳐갔다. 지독하고, 갑갑하기 그지 없는 담배연기와 그 냄새 마저도 자정 시키는 성지 특유의 차분한 라일락 향이 바람을 타고 코 끝을 향긋하게 간지럽혔다. 나는 목에 들어 차는 가래 대신에, 덥고 끈적한 숨을 공기중으로 내 뱉으며, 성지를 보던 시선을 돌려 구름 한 점 떠있지 않은 맑고, 맑은 하늘을 바라 보았다.
아까부터 바지 주머니 속에서 집착있게 울리던 휴대폰의 작은 진동이 드디어 멎고 있는 참이었다. 부재중이 족히 한 5통은 쌓여 있으리라. 이 고루하고, 익숙하기 까지 한 집착의 주인은 안 봐도 뻔하다. 나는 괜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휴대폰 몸체를 힘있게 꽉 쥐었다. 죄 없는 나의 휴대폰이 마치 김민규라도 된 마냥,
“오늘은 학원 때문에 먼저 갈게.”
앞질러서 걸어가던 성지가 갑자기 뒤돌더니,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응, 나는 괜히 서둘러 대답하며 주머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있던 손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멈추었다. 흘끔, 곁눈질로 바라 본 휴대폰 액정 위로 '부재중 전화 7통, 김민규' 라는 예상을 빗겨가지 않은 뻔한 글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돌려 저 멀리, 아직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서있는 성지를 무표정하게 쳐다 보았다. 태연한 척 하는 앞과는 달리, 등에는 더위 때문인지, 이 심리전을 펼치는 듯한 묘한 긴장감 때문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작은 식은땀이 도르륵, 등에 푹 패인 골을 따라서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가방끈을 두 손으로 부여 잡은 채 골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던 성지는, 다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것이 본의 아닌 비밀을 간직해버린 나를 정확하게 간파한듯한 섬뜩한 신호로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성지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좋은 하루 보내, 승관아.”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로 끝맺음 하며, 다시 뒤돌아서 사라지는 성지의 뒷모습을 쳐다 보았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스치는 덥고 무거운 바람의 무게처럼, 잠시 이름 모를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 망각하고 있었던 현실이 나를 거세게 치고 들어왔다.
-
“여름 방학 때는 못 봐.”
왜?
재빠르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김민규의 눈은 분명하게 묻고 있었다. 입은 달싹, 달싹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또 꼴에 자존심은 지키려는지 말을 내뱉지는 않는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말을 이어갔다.
“여름방학에는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
“뭐야. 진짜 못 보냐?”
아쉬움 가득한 김민규의 목소리가 내 머리까지 울렸다. 나는 일부러 김민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정면을 고수 하려 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김민규 쪽으로 다시 천천히 돌렸다. 마주한 퉁명스럽고 불퉁한 얼굴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아쉬움과 실망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나를 대하는 김민규의 말과 행동들을 모두 종합해 보았을때, 이 정도 반응 쯤이야 충분히 예상한 빤한 것이라지만... 사실 아직도 조금은 새롭고, 놀랍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오직 싸움 실력 하나로 모든 학교를 한 손바닥에 올리고 쥐락,펴락 학교의 정세를 가닥 잡고 있는 새끼가, 고작 이런거 하나로 바로 중학생 김민규로 빠르게 돌아와서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지나치게 철 없는 본인의 모든 감정들을 자랑하듯 투명하게 내 비춘다. 그 괴리감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나는 평소에는 별 생각 없이 익숙하게 받아 들이다가도, 가끔 고장난 시계가 된 듯이 아리송한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김민규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 적응을 하지 못한 것 일수도 있다.
“너 나 좋아하지.”
“뭐라고?”
“존나 집착질.”
그래서 이런 괴리감이 젖어 드는 순간이 오면, 나도 모르게 김민규에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무심결에 뱉고 마는 것이다. 현재의 생각과 감정을 내게 가감없이, 과감하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 전달하려는 폭주 기관차 같은 김민규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더는 선을 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점점 내 일상에 과도하게 침범하기 시작하는 김민규를 두려워하고, 방어하고 싶어하는 허겁한 무의식이 고안해낸 제어 장치였다.
그리고 이번 역시도 내가 기대했던 결과로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톡, 벌침을 쏘아댈 듯 마중 나와 있던 김민규의 입이 금세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얌전하게 안으로 다물렸다. 나를 보는 미묘한 표정의 김민규는 내 말에 부정도, 긍정도 없이 나즈막한 한숨만 짧게 내쉬었다. 나는 대놓고 노골적인 상심에 빠져 있는 김민규를 보다가, 구태어 하지 않아도 되는 말까지 덧붙였다.
“여름방학때까지 만나면 성지가 의심 할지도 몰라.”
“의심하라 하지? 걔는 바람 필 거 다 피고, 자기 할 거 다 하고 다니는데 너는 왜 하면 안되는데.”
“그런 애 아냐.”
“얼씨구. 눈물의 실드 납셨네.”
비꼬는 김민규의 말이 귀에 박혔다. 하나도 모르고, 둘도 모르는 김민규는 큰 착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성지가 바람 피운건 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잘난 씨발새끼가 나와서 꼬셨나 싶어서 나왔더니. 이렇게까지 대책 없는 씨발새끼인줄은 몰랐지.”
정말 이렇게 대책 없는 새끼가 성지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나한테까지 그 마수를 뻗쳐 내 인생에 성지 다음으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울 줄은 몰랐다. 김민규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눈을 깜빡, 깜빡거렸다. 그 사실이 진위인지 판가름 하는 듯 했다. 성지는 자신한테 호감을 보이는 남자를 상대로 그냥 가지고 논 적은 있어도, 적어도 바람을 핀 적은 없었다. 성지가 최승철 형 다음으로 흥미와 더불어 이성적인 호감까지 느낀 상대는 김민규, 네가 처음 이라는 거다. 김민규는 복잡하고,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혹시 일말의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따지고 보면 사실 김민규는 큰 죄는 없는데. 성지가 남자친구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제한 거 뿐이고, 내가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별 미련 없이 성지를 버렸다. 그 대신 나를 자신의 그라운드로 끌여 들었지만.
“아무튼 여름방학때는 부르지 말고.”
“좀 열 받는데, 일단 알겠음,”
“이왕이면 앞으로도 안 불러 줬음 좋겠다.”
“그건 싫음.”
단호하게 뚝 떨어지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눈을 매섭게 흘겼다. 김민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별 표정 없이 자연스레 내 손을 당겨 잡았다. 큰 키와 알맞는 크고 차가운 손이 단숨에 나를 당겼다.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 손의 차가운 온도를 느끼며 끌려갔다.
이상하다, 이상해.
나는 나를 익숙하게 끌어 안는 김민규의 품에 안겨서는 생각했다. 이상하다. 김민규와 나와의 관계는 사방에 압정이 촘촘히 빈틈없이 박혀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거기서 나름의 안식을 찾게 되니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김민규와 함께 지냈던 짧은 기간을 떠올렸다. 내 짧은 인생 속에 존재했던 잔잔했던 그 일상들을. 지나고 나니, 나 역시도 아까의 김민규 처럼 진득한 아쉬움이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방학이 찾아오면, 내게 어떤 현실이 닥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성지는 싸움을 좋아했다. 나를 싸움에 끌여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서 누군가를 밝는 것도 좋아했다. 외유내강은 정확히 성지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라고 봐도 무방했다. 김민규보다 한 수 위인 냉혹함과 냉정함을 가졌지만, 성지는 그 본능을 항상 엄격한 집안과 주위의 시선 때문에 철저하게 숨기고 살았다. 그러다가 그게 사무치게 답답할때는 가끔 나를 싸움을 붙여 놓고, 중간에는 자신이 끼어들어 상대를 피죽으로 만들 정도로 패고는 했다. 소싯적 운동을 하셨다는 체격이 좋은 아버지 덕분인지, 의외로 성지는 타고난 운동 신경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어느정도 파워도 있었고, 싸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적어도 어떻게 사람을 치명적인 굴욕을 느낄 만큼 짓밟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지 본인이 싸움을 잘한다 하더라도 그걸 표출할 수 있는 라운드가 언제나 제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성지는 항상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낸 천사 같은 이미지 때문에 남들을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물리적인 힘으로 정복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 또한 성지에게는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성지는 나를 만나기 전 부터 이미 물리적인 힘 뿐만 아니라, 남들의 심리와 불안함을 가지고 정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아주 탁월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자신의 장기 말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하나씩 지배해갔다. 그게 성지의 물리적인 힘을 배제하고도 온전한 권력을 누리는 방식이었다.
그런 성지의 본능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때가 바로, 방학기간 이었다. 평일에는 시간의 제약이 많지만, 그나마 방학에는 성지에게 주어진 자유가 있었다. 그 자유시간을 이용해 싸움을 하는 것이다. 나를 이용해서.
내가 방학기간 중에 김민규를 만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방학동안 거의 끌려온 포로처럼 성지에게 끌려 다니며 성지가 주관하는 모든 크고 작은 싸움을 했어야 하니까. 이 사실을 김민규에게 당연히 말할수는 없었다. 원래 그런건지 모를 오지랖 넓은 김민규가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 안 봐도 훤히 내다 보였기 때문이다.
“승관아.”
못 일어나겠어?
온 몸이 다 욱씬 거렸다. 거의 한계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배를 세게 한 번 걷어 차인 이후에 숨 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명치 끝부터 찌르르 말못할 고통이 나를 과녁판 삼아 툭툭, 강렬하게 꽂혔다. 나는 바닥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디서 흐르는지도 모를 검붉은 피를 보며 눈을 감았다. 희미해지려는 의식 속에서 성지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이렇게 까지 애를 때리면 어떡해요. 애 죽으면 어떡하려구. 차분한 목소리에는 역시나 그렇듯 전혀 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승관아, 어떡해. 일단 병원을 가자. 벌써 쓰러지면 곤란한데. 성지의 조곤한 말씨가 이제는 무서워졌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손이 내 볼을 툭 건드렸다. 흥미가 떨어진 낡은 장난감을 건드리듯, 조심성 없는 손짓이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일어 났을때는, 낯선 향기가 가득한 병실 안이었다. 난 의식을 차리자 마자 병실 안 의자에 앉아 있던 아빠에게서 뺨을 세게 후려 맞았다. 학교가서 허구한날 싸움질만 배워 처먹을거면 차라리 학교를 그만 둬라. 뺨을 때리고 나서 내게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휙, 그대로 병실을 나가버리는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생각했다. 우리 아빠,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엄청 자상하셨는데. 하루가 다르게 삐딱선을 타는 아들 보기가 얼마나 힘겨웠을까. 문득 얼굴 본 지도 제법 오래 된 엄마도 생각 났다. 모든게 먼 일처럼 느껴졌다. 현실과, 과거가.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마냥 낯설게만 느껴졌다.
의식을 차린 나를 체크 하러 오신 간호사 선생님께 내가 얼마나 입원해 있었냐고 물었다. 하루요. 골절이 있기는 한데 심각하지는 않아서 한 2주 정도만 입원해 있어도 회복은 금방 될거예요. 썩 친절한 목소리를 들며 병실 천장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승관아, 괜찮아?”
성지가 병실에 찾아 온 건 입원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나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오는 성지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 보았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내 앞에 앉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으려는 손길을 나도 모르게 피했다. 성지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지만, 이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거두었다.
“그 오빠가 참 정도를 몰라. 그냥 적당히 하면 되는데... 너한테도 미안하다 전해 달래.”
지금 와서 별 부질 없는 말 이다. 나와 싸운 상대는 작년에 졸업한 한 성격 하기로 유명한 유도부 선배이다. 유도를 한 터라 체격 차이도 엄청 나서 애초에 이길거라는 생각을 하고 덤빈 건 아니었다. 대충 이런 결과를 예상했지만 싸움에 떠민건 성지였고, 거기에 그대로 그냥 응해버린건 나였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언제 쯤 퇴원 가능 하니?”
이 말이 나올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성지의 입에서 듣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성지에게 내 존재는 뭘까? 그저 욕구를 실현 시켜줄 수 있는 수단?
“다음 주.”
“그렇구나.”
성지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실망이 가득한 표정을 보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내 입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회복 속도가 빨라서 더 빨리 퇴원할 수도 있대. 덧붙인 말에 성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방학만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내가 병상에 누워 버리면 아주 곤란한 것이겠지. 성지는 가져온 병문안용 음료 세트를 옆에 성가시듯 밀어 두며 일어나더니, 시체처럼 움직임 없이 행동 반경을 따라 눈만 도르륵 굴리는 나를 내려다 보며 싱긋- 웃었다.
“승관아, 미안해.”
“......”
“앞으로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할게.”
그러니까 빨리 나아.
성지는 내 손을 꽉 잡았다가 놓으며 병실 문을 열었다. 나가기전에 고개를 빼고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가만히 성지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순간적인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차라리 미친 척 하고 말할걸. 너무 아파서 더는 싸움을 하지 못하겠다고.
멍하니 후회와 사색에 잠겨 있는 시간 틈으로 문이 다시 한 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지가 다시 돌아 온걸까. 내가 회의감에 빠져 있다는 걸 알고? 나는 다시 몸을 바로 세우며 문 앞을 쳐다 보았고,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굳은 표정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건, 김민규 였다.
“뭐야? 너 어떠...”
“뭐, 왜. 어떻게 알고 왔냐고? 네가 안 말해줘서 알아서 주워 들었다, 왜.”
“...야, 김민규.”
“한성지랑 마주쳤냐고? 마주쳤다, 왜. 여전히 변함없이 재수 터지더라.”
김민규는 신경질적이고 방어적인 목소리로 툭, 놀란 나를 향해 쏘아 붙였다.
...대체 어떻게 알고 온거지? 게다가 찾아 온 타이밍도 하필 성지랑 겹치다니. 둘이 마주쳤다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김민규가 쓸데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닐까. 눈치빠른 성지가 무언가 눈치 챌만한, 무언가를 흘린건 아니겠지.
대체 여기까지 왜 찾아 온거지? 왜 온거야, 김민규. 방학때는 못 본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복작함으로 머리거 터질 것 같은 나와는 반대로 김민규는 시큰둥하게 아까 성지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나는 김민규를 쳐다 보고 있는데, 항상 집요하게 내 눈을 마주봤던 김민규가 이번에는 내 눈을 피했다. 고요한 김민규의 눈은 많은 걸 담고 있었다. 분명 방학동안 연락하지 말라더니 보란듯이 이런 꼴이 돼서 입원해 있는 나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은 무수할텐데, 쉽사리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김민규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듯. 서로 할 말을 찾는동안 한동안 깔린 침묵을 깨고, 김민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누구랑 싸웠냐?”
“...김민규, 제발”
“......”
“나한테 제발 간섭 하지마. 너 이러는거 존나 짜증나고 불쾌해.”
김민규는 땅으로 처박았던 눈을 돌려 나를 매섭게 노려 보았다. 나는 그에 응수하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김민규, 정말 미안하지만 이건 나의 진심이다. 김민규가 내 일상에 침범하면서 지분을 점차 넓혀갔던건 사실이고, 나 역시 몇 달은 성지의 눈을 피해 편안함과 평범한 일상에 몸을 적셔갔지만, 결국 나는 이렇게 운명을 피하지 못하는 신세다. 난 김민규와 멀어져야 한다. 난 이제 성지에게서 벗어 날 수 없고, 김민규 역시 나를 성지에게 벗어나게 해줄 수 없다. 그리고 난, 결정적으로 김민규 네가 성지의 눈에 띄지 않기를 원한다. 너도 가랑비에 온 몸 젖어 버리듯, 성지에게 하나 둘 몸과 마음이 모두 지배 당해버려서 나처럼 괴로운 결과를 수용하며 살아야 할까봐. 나는 그게 너무 무서우니까. 내가 아닌 또 다른 사람이 그런 꼴이 되어 버리는 건 너무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 그게 내가 찰나의 일상을 허용해 주었던 김민규, 네가 된다면 나는 너무 괴로워서 그 죄책감에 미쳐 버릴 지도 모른다. 성지가 너에 대한 냄새를 맡을까봐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너는 모르겠지. 넌 성지의 두려움을 아직 반도 이해 못하고 있으니까.
김민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깊은 함숨을 내쉬었다.
“부승관.”
“......”
“내가 한성지 죽여 줄까?”
거기서 김민규가 꺼낸 말을 정말 놀라웠다.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김민규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두려움이 치밀어 오를만큼. 일말의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에서 나오는 가시박힌 시선이 내가 다시 한 번 뾰족하게 박혔다. 장난이 아니었다. 김민규의 진중한 표정은 내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와 성지의 관계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 만이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김민규는 어느 정도 간파 한 듯 했다. 종속적인 나와 한성지의 관계를.
방금까지만 해도 김민규는 나를 성지에게서 벗어 날 수 있게 할 수 없다 생각했는데, 그 생각과 편견을 단숨에 깨뜨렸다. 김민규는 굳이 돌아 돌아 표현하는것도 없었다. 이런 말을 할 때조차도 딱 자신의 성격대로 무섭도록 협박적이고, 버거울 정도로 솔직하게 둘러가는 것 없이 표현했다. 한성지를 죽인다니.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내가 성지로 인해서 피가 말라 죽어가는 상상만 했지, 성지를 죽인다는 생각은 단언코 해본 적 없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그걸 입 밖으로 낸 게 김민규였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 내가 죽여 달라 하면 정말 죽일 수 있을 것 처럼 단언하며. 대체, 왜? 왜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몇 달 전만해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친구였던 성지를 죽여주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거지?
“누가 멋대로. 너는 성지 절대 못 죽여.”
“......”
“성지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널 죽여버릴거니까.”
하지만, 김민규의 의도가 어떻든, 난 김민규의 장단에 맞춰줄 수 없다. 난 김민규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다. 혼란스러웠지만, 난 최대한 감정의 동요를 숨기며 김민규를 마주 보았다. 김민규는 내 눈을 피하지 않으며 말아쥔 주먹을 허탈하게 풀었다. 김민규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여주겠다고 까지 했는데, 도로 자신을 죽여버릴 거라는 내 대답을 들었을때. 나는 정신 없이 뛰는 내 심장 소리가 제발, 김민규에게 들리지 않기를 기도했다. 영원과도 같은 한참의 신경전이 끝나고, 김민규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나가며 천천히 병실문을 열었다.
“이제 연락 안 할게. 잘 지내라.”
끝내, 김민규는 나를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아마 오늘의 대화로 절절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성지를 버릴 수 없다는 걸. 나를 자신의 편으로 회유 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나와의 관계를 끝내는게 더 나을거라 판단 했을 것이다. 현명한 김민규라면.
그래, 잘 된 일이다. 이제 속 편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문을 조용하게 닫고 나가는 김민규를 바라 보았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커다란 돌덩이가 나를 누르는듯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
지난주에 시험이 끝났는데, 업로드가 늦었네요.
ㅎ_ㅎ...놀고 노느라... 흐흐
암튼 담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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