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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학생! 그러다 넘어지겠어.


얼마나 지속 되건지 알 수 없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던 암로가 괄괄한 목소리에 가로 막혔다.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현실로 빠르게 돌아온 나는, 검은 봉지를 손목에 걸고 있는 쭈글쭈글하고 투박하고 낯선 손이 신발끈이 풀려버린 내 너절너절한 신발을 향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멍하니 고개를 사선으로 올렸더니, 거뭇거뭇한 수염을 수더분하게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꽤나 흉악한 인상의 아저씨가 눈살을 짜붓,해보이며 무게감 없어 보이는 검은 봉지를 동여 잡고 다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여간, 요즘 애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대상으로 내씹고 있을게 분명한 아저씨의 혼잣말이 바람을 타고 귀로 흘러 들어오는듯 했다. 나는 그제서야 느릿 느릿한 몸짓으로 무릎을 굽혀 다 풀려버린 신발끈의 양쪽을 잡았다.



「00아파트 놀이터에 있을게. 얼른 와.」



오랫동안 미적거리며 신발끈을 묶고 난 뒤에는, 또 버릇처럼 주머니에서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휴대폰을 꺼내서 30분 전에 수신된 성지의 문자를 또 다시 몇 번이고 읽었다. 멋없고 무미건조한 성지의 문자에는 차마 거스릴 수 없는 마법이 있다. 있는 힘껏 반항하고, 저항하고 싶은 그 명령을 순순하게 받아들이도록 조종 하는 강력한 힘. 그 힘에 이끌려서, 나는 또 피로한 내 몸과 마음을 억지 통제하며 김민규가 사는 동네까지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휴대폰을 든 모양 그대로 멈춰서서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 머리 위로 펼쳐진 저 구름 하나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에 나의 침을 뱉고 싶다는 무용한 욕구가 스며 들었다. 그와 동시에 고갤 드는 욕구는 낯설지만, 어쩌면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아, 죽고 싶다...저 하늘에서 부터 이 바닥까지, 머리부터 고꾸라지면 단번에 죽을까?

 

내가 죽으면 내 주위 사람은 어떻게 될까? 엇나가기만 하는 나를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부모님은 슬퍼하면서도, 왜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냐는 대답 없는 질책을 퍼부으실지도 모른다. 학교 애들은 어떨까? 광라리로 매일마다 흥밋거리를 물어다 주던 사람이 없어지니 처음에야 크게 아쉬워 하겠지만, 며칠만 지나도 제 2의 광라리를 물색하며 추양할 준비를 하겠지? 잊혀짐은 빠르니까. 

성지는 어떨까? 아마 그곳에 있는 누구보다 크게 눈물을 보이지 않을까. 어수선하게 치뤄지는 내 장례식장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곡소리를 내주겠지...웃지 않고 있는 내 영정사진 앞에서, 넌 실신할 정도로 울면서 슬퍼하겠지.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잖아.

승관아, 왜그랬니...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니... 성지야, 네가 내 앞에서 부질 없는 질문을 할 지도 몰라. 그건 아마도 정말 내게 궁금해서 묻는 질문 일거야. 왜 너의 장난감이라는 중요한 명분을 쉽게 버리고, 내가 그렇게 죽어버렸는지. 왜 너를 실망 시킨건지, 넌 궁금할거야. 그럼 난 하늘에서 이렇게 대답 해줄게.

난 숨 돌릴 틈이 필요 했어.



「승관아 민규가 오는게 보여. 너도 곧 올거지.」



 넌 네게 가는 내 발걸음 마저도 쉬지 못하게 재촉하잖아.
죽고 싶다는 충동을 실행할 틈 조차 주지 않잖아.




-



: 중학교 3학년의 부승관, 그리고 김민규




완연한 어둠이 세상을 덮었을때, 그제서야 나는 성지가 나를 부른 놀이터 근처로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겪은 많은 날들이 있었지만, 맹세컨대 오늘 처럼 성지의 명령에 순응하기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아까 잠시 만나 나를 송두리채 흔들었던 승철형이 그 이유기도 했지만, 나는 지금껏 당연하다고 느꼈던 모든 상황들에 조금씩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성지는 내가 평범하지 않은 일상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 독한 수를 쓰고, 나는 염증이 나서 찢어 지고, 파탄나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을 마비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견뎌야 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그대로 방치했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한계가 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이유는 진아에 대한 죄책감에서 발아 된 것이다. 우습게도 지금은 얼굴도, 목소리도 가물 가물하고 오롯이 그 당시의 분위기와, 느낌만 존재하는 진아에 대한 기억 하나가, 나를 이렇게 까지 바꾸었다.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난 성지의 눈 안에 차지 않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었겠지. 이 지역에서 싸움으로 가장 유명한 김민규라는 놈과 질게 뻔한데도 싸우러 가는 기회조차 없었겠지...

아까 그랬듯, 이런저런 몽상속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놀이터 입구 까지 도착 해있었다. 바로 정면에는 성지 무리들로 보이는 형체들이 어둠 속 가로등 불빛 밑에서 어렴풋 보이고, 그 정면 가운데에는 성지가 서 있는게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김민규를 찾으려 했지만, 어렵지 않게 바로 김민규의 존재를 발견했다. 누가봐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게 우뚝 솟아 있는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나는 당연하게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저 놈이 김민규구나. 나는 지난 3년 나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김민규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타인에게서 그렇게 다양한 이미지와 가십을 쌓아 올리고 있는 김민규 라는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일까... 까다로운 성지의 구미를 당긴 김민규는 대체, 어떤 놈일까.



“...싸우기 전에 분명 말하는데, 난 너의 그 얼굴이 너무 좋아. 그래서 사귀자고 한 거 거절 안 한 거고. 지금도 솔직히 그 번지르르한 껍데기는 놓치기 싫거든? 그니까 나를 두고 승관이랑 싸워. 네가 이기면 승관이랑 헤어지고 계속 네가 원하는 모습의 여친으로 계속 옆에 있어 줄게.



성지의 조곤 조곤 타이르는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저 판 속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깨달았다. 아, 성지가 김민규한테 가면을 내려 놓았구나. 그럼 이제 한성지에게 김민규는 뭐지?...제 2의 장난감? 나는 잠시간 멈춰서서 멍하니 흥분해서 반박을 시작한 김민규의 뒷모습을 보다가, 성지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지금 때려.


성지는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나는 그것이 주문이라도 된 듯, 망설임 없이 김민규의 뒤로 성큼성큼 걸어 가서 다리를 들어 녀석의 허벅지를 세게 걷어차버렸다.



“야! 너 지랄 좀 하지 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이미 정은 아까 아까 다 뗐거든? 난 그런 전제조건이면 안 싸워. 줘도 안 가질 건데 뭐를 위해 싸...엌”



흥분한 목소리로 성지에게 쏘아대고 있던 커다란 녀석이 내 기습 공격으로 묵직한 비명 소리와 함께 모래 바닥으로 푹, 모양 빠지게 꺼졌다. 승관아, 왔어?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대의 미소를 짓는 성지에게 눈짓으로 인사 하고 밑을 내려 보았다. 바닥에 앉은 그 상태 그대로 뒤를 돌아 나를 황당하게 쳐다보는 어둠 속 김민규와 눈이 짧게 마주쳤지만, 나는 금세 눈을 떼어 버리고 말했다.



“일어나”



내가 시선을 거둔 후에도 김민규의 눈은 내게 진득한 거머리 처럼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몸에 끈적하게 감기는 관찰의 시선을 그대로 체감하며, 날 바라보는 또 다른 한 명, 성지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환호에 찬 성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목구멍 밑으로 간질 간질 거리는 말을 그대로 주저 없이 내뱉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다.


한성지, 이제 이딴거 시키려고 나 부르지마.


오늘 내내 나를 괴롭혔던 매너리즘의 여파였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낯선 새끼와 싸움 하는 것도 지겹고, 호구 소리 들으면서 네 밑에서 따까리 짓 하는 것도 지겨워. 그래, 그러면서도 성지 너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초조한 내 변덕적인 이면은 혐오스럽지. 네가 그냥 김민규에게 갔으면 좋겠지만, 아니기도 해. 나는 나를 잘 모르겠어. 딜레마에 빠진 나를 지운게 너라서 내가 예전에 어땠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복잡해지는 생각을 단숨에 비우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성지야. 이런 곳은 부르지 말랬잖아”



틀렸다. 나는 일전에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그럼에도 성지는 별 개의치 않는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 앞에 펼쳐질 흥미로운 상황이 더 기대를 걸고 있을 것이다. 나와 김민규가 싸우는...그 개싸움에.



“미안. 얘가 그 호구 김민규야. 오늘 너랑 싸울.”



나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서 새로운 주인공, 김민규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아까 볼품 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김민규는 어느 새 일어 서서 나를 삐딱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김민규는 내가 들었던 수많은 모습들과 비교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유사 하기도 하고, 아예 딴판으로 보이기도 했다.

 

키는 크다고 들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냥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커서 고개를 많이 올려다 보아야 한다. 싸움을 잘하는 놈의 몸 치고는 꽤나 마른 느낌이 들었으나, 입고 있는 옷의 어깨 봉제선을 침범할 만큼 어깨가 넓었기 때문에 그와 또 다르게 덩치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또래에 비해 훨칠하게 큰 키와 넓은 어깨. 단 두 개만으로도 상대를 충분하게 기죽일 수 있겠지만, 김민규가 가진 건 비단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김민규가 왜 정도중을 넘어서 다른 중학교 까지 소문이 날 만큼 유명세를 탔는지, 왜 성지가 김민규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었는지 오늘 직접 보고 나서야 단번에 그 미제는 해결이 되었다.

김민규는 우선 풍겨 나오는 아우라 부터가 남들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보통의 범주를 훨씬 뛰어 넘은 스산할 정도의 정기가 녀석을 촘촘히 감싸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 놈은 싸움 뿐만 아니라, 어딜 가서 무얼 하고 살더라도 절대 보통 내기로 살아갈 인물은 아닌 것이다. 물론 남을 주춤하게 만드는 그 아우라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얼굴로만 따져봐도 이목구비가 조화롭게 번듯하고, 같은 남자로서도 절로 감탄이 새어 나올만큼 훤칠한 용안을 가졌다. 턱선이 갸름해서 어떻게 보면 얄쌍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짙은 눈썹 밑에 있는 날카롭고, 곧은 눈매 속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지배를 단숨에 뚫을 듯한 범상치 않은 기운과 절대적권위를 내보이고 있어서 그 느낌은 단숨에 증발했다. 내가 지금 보는 김민규는 가만히 서서 적을 탐색 하는 듯한 정적인 모습조차 강박을 느끼게 만든다. 성지를 알기 전의 나였다면 두려워서 바로 자리를 피했을 상대다.

내가 그랬듯, 녀석도 나에 대한 이견을 내고 있는지 시간이 지날 수록 표정 없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 나기 시작했다. 외강내강 김민규는 나를 보며 외유내강의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입을 열었다.



“넌 반격할 줄도 모르나 봐.”



내 말에 녀석은 양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거칠게 되묻는 녀석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구먼. 진짜 등신이냐?”



그리고 녀석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주먹을 날렸다. 아까 방심한 상태와는 다르게 녀석은 날렵한 몸짓으로 내 주먹을 가볍게 피해 버렸다. 나는 페이스를 잃지 않고 곧바로 아까 찼던 녀석의 다리를 다시 한 번 걷어 차고, 녀석이 주춤한 틈을 타 다른쪽 다리도 걷어 찬 후에 엎어진 녀석 위에 올라타서 아까 내가 용안이라고 생각 했던 그 잘생긴 얼굴에 정통 주먹을 날렸다. 퍽, 큰 소리와 함께 녀석의 얼굴이 왼쪽으로 거칠게 돌아갔다. 녀석은 입 안에서 터져버린 피를 빠르게 모래에 뱉더니, 다시 나를 노려보며 얼굴에 꽂으려는 내 주먹을 세게 밀어내고 벌떡 일어섰다. 나는 그와 동시에 두어걸음 물러나 아까처럼 녀석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동요도 없고, 상황판단이 빠르다.


당혹스러운 표정은 말끔하게 지워지고, 녀석은 금세 저 페이스를 되찾았다. 나를 향해 성큼 성큼 걸어온 김민규는 그 긴 다리로 나를 뻥, 찼다. 나는 단숨에 뼈까지 저려오는 그 아린 고통을 느끼며 주저 앉았다. 김민규는 옆을 돌아보고 짧은 숨을 후, 들이 쉬더니, 내게 경고 하듯 말했다.



“싸우기 전에 미리 말하지만, 내가 이겨도 한성지는 절대 안 가진다.”



그게 얼마나 웃기는 말이었는지, 김민규 너는 아직도 모르지. 




-




“이제 그만.”



귓전에 성지의 목소리가 닿았다. 이길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이길 의지 조차 없었던 나는 욱씬 거리는 온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모래바닥에 누이고 있었다. 성지는 내게 다가와 자신의 희여 멀건한 손을 정답게 내밀었다. 힘이 들어 가지 않는 오른손을 애써 올려서 마주 잡았더니, 성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생하는구나? 고생을 시킨 장본인이 그런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으니, 꽤 오랜 시간 동안 김민규와 싸우며 맞고 있었던 내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랬듯, 내색하지 않았다. 피죽이 된 나에 비해서 제법 멀쩡한 김민규는 손으로 갈라진 앞머리를 쓸며 무표정하게 나와 성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느새 성지는 우리 둘 사이에 서서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이긴거지? 결정을 못내리겠네.”
“…내가 말했지. 애초부터 난 이제 너한테 볼 일 없으니까. 부승관이랑 잘 해 처먹으라고.”



나는 멍하니 홀린듯,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김민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성지에게 목매며 좋아했을게 분명할 놈이 단숨에 태도를 바꾸어서는 귀찮은 짐짝을 대하는 듯한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대할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그와 동시에, 저 녀석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나처럼 성지가 물고 뜯을 만한 건덕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처럼 내 자신을 스스로 약하다고 치부하고 자기 혐오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다. 원하는건 어려움 없이 이루며 자신만의 세계에서 주인으로 살아 왔을 놈이다. 성지조차도 난항을 겪는 상대인 것이다. 아마 성지에 대한 콩깍지가 오늘로서 벗겨졌을 녀석은 다시 무적으로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성지는 아마 처음으로 겪었을 굴욕에 평소같은 인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니가 뭔데 거부를 해, 니가 뭔데. 지금 나 쪽 주는거야? 내가 선택 하겠다잖아.”
“… 너 지금 농지거리하냐?”
“왜 그렇게 살벌하게 쳐다봐? 나는 때리면 안 돼? 그럼 너도 때리던가”



성지가 김민규의 멱살을 부여잡고 얼굴을 내리친건 순식간이었다. 그 순간 초등학교 6학년, 그 옛날에 성지가 내 뺨을 때렸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김민규는 맞은 자신의 뺨을 한 손으로 쥐고 누구 한 놈 제껴 치워 버릴듯한 이글이글한 눈으로 평정심이 사라진 성지를 바라 보았다. 나는 김민규가 성지에게 달려가 당장이라도 보복이나, 해코지를 할까 몹시 두려웠지만 의외로 김민규는 주먹만 떨었을뿐, 어떠한 물리적인 위협 없이 그저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 보는게 전부였다.



“누구를 선택할지는 좀 더 고민하고 말해줄게. 승관아 수고 많았어, 민규도. 둘이 진짜 잘 싸우더라. 난 엄마한테 전화와서 이만 먼저 가볼게. 승관아, 안녕! 민규야 연락할게.”



 싸움을 시킨 장본인인 성지는 금세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성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성지의 뒤에는 성지가 남들 몰래 중학교 1학년때 부터 이런 상황이 생길때마다 호위무사 마냥 몰고 다니는 익숙한 패거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성지는 입꼬리를 처연히 올리더니 입모양으로 소근거렸다.


'아프겠다, 승관아.'


순간적으로 입안에 텁텁하고 비린 쇠맛이 짙어졌다. 나는 성지의 눈을 피했다.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같은 손짓을 느끼며 고개를 비참하게 떨구었다.



“넌 어떻게 저런 미친년이랑 사귀고 있냐?”



성지는 떠났지만, 김민규는 남았다. 옷에 들러 붙은 모래를 털던 녀석의 무심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는 내 모습은 어떨까. 새삼 드는 생각이었다. 김민규는 나를 어떻게 볼까.



“호구는 너네, 부승관.”



호구 같은 새끼.

쓸쓸하게 말했던 승철 형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나를 찌르는 듯 했다. 나는 오늘 다른 각각 사람에게 호구 취급을 두 번이나 당했다.



“누가 그걸 몰라?”
“뭐?”
“누가 호구란거 모르겠냐고.”



나는 바닥에 붙을 것만 같은 무겁고 축 쳐지는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김민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로 내 행동반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


김민규, 너는 왜 안 가?


나는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녀석의 잘난 입술새에 짧게 흐른 핏자국을 보고 있었지만, 김민규는 내 눈을 피했다. 그 냉한 느낌 가득한 얼굴에 묘한 죄책감이 두둥실 떠올랐다. 엉망이 됐을 내 얼굴을 보고 어줍잖은 동정심이 들었겠지. 



“뭐해? 아직 싸움 안 끝났잖아.”
“아니. 끝났는데? 누가봐도 내가 이겼잖아.”
“씨발놈이 입 터는거 봐라. 내가 졌다고 인정을 안 했는데.”
“니가 좋아 죽는 한성지 때문에 그 지랄이면 차라리 내가 진 걸로 쳐. 난 이제 한성지 볼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김민규의 질린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아까 전 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머리가 더더욱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웃기지마. 성지는 성지고, 승부는 승부지.”
“아, 이 새끼 체면은 드럽게 챙기네. 내가 진 걸로 하라니까? 이제 더는 못 싸워.”
“넌 가오도 없냐? 도망치지마.”
“…너 진짜 죽고 싶은거지.”



김민규, 그냥 내가 무슨 말을 하던지 무시하고 가주라.

지끈거리는 머리 속에 아까전에 승철형의 말과 행동이 자꾸만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불안정한 심장의 고동이 들린다. 김민규는 바닥에 침을 거칠게 뱉었다. 아까의 죄책감은 사라지고, 다시 눈빛이 잔뜩 사나워졌다. 녀석은 그 사이 다시 결심이 선 건지 끝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싸ㅇ…”
“치킨게임이야.”
“뭐?”



김민규, 김민규...그냥 가줘. 제발...
제정신이 아니야.



“먼저 내빼는 사람이 지는거다. 알겠냐?”



영문 모를 표정이 된 김민규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다.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은 김민규가 허리를 굽힌 틈으로 녀석의 얼굴을 낚아채서 잡았다. 그리고 녀석이 내 손을 풀고 반격을 하려 할때,


김민규에게 키스를 했다.


크게 당황하며 어쩔줄을 모르는 듯 가만히 서 있던 김민규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내 가슴팍을 밀쳤고, 나는 반항없이 순순히 그 힘에 밀려 났다.

씨발...혼이 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 보는 김민규의 입에서 그제야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무슨 반응을 해야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내빼면 진다고 했잖아.”



겁쟁이 새끼.
분명 그 말을 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 눈에서는 한 두 방울씩 뜨거운 것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죽고 싶어...


김민규는 나와 멀찍이 떨어져서 울고 있는 나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



...그때의 나는, 잠깐 내비췄을 뿐인 나의 그 불안정한 모습과, 충동적인 그 행동이 김민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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