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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성지 이야기를 시작하면, 500P 분량의 장편소설이 탄생 할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 한성지는 진아보다 더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인물이니까.
한성지는 초등학교 5학년, 내가 다니는 바른초등학교로 전학 왔다. 수도권에서 살다가 아버지 전근으로 우리 학교에 전학 오게 됐다는 전형적인 레파토리였다. 전학 오던 첫 날에 한성지가 어땠는지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예쁘고, 지금보다 앳된 소녀였다. 흰색 토끼가 그려진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샛노란 가방을 매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숱 많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조금은 수줍고, 어색한 표정에 붉은 홍조를 띄우며 책가방을 작은 양손으로 꽉 쥐었다, 펴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얌전하고 귀여운 전학생의 등장에 우리 반은 단숨에 어수선해졌다.
평소에 나였다면 누가 전학 오든 말든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을텐데, 이상하게 한성지는 오자 마자 묘하게 내 시선을 사로 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내가 나서서 지켜주고 싶은 충동이 들게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외관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나는 진아 사건을 겪고 난 뒤였기 때문에, 한성지의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에 매료 됐을것이다. 한성지의 모습에서 진아를 투영해서 보고, 동일 선상으로 단정지었을지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저 애야 말로, 내가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위험한 발상이었다.
한성지가 전학 오고 한 달이 지나갔지만, 한성지와 나는 접점이 쉬이 생기지 않았다. 성지는 언제나 인기가 많았다.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고 늘 사람을 몰고 다녔다. 성지는 착했으며, 다정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못된 애들도 성지 앞에만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성지를 떠받들정도 였다. 겨우 한 달 남짓 지났을뿐인데, 한성지는 우리 반의 중심 인물이 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늘 반에서도 겉도는 존재 였다. 3학년 그 사건 이후로는 눈에 띄게 우울해지고, 내향적인 성향을 온 만면에 드러내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도 자연스레 멀어졌고, 내 모든 증오의 대상인 김지한이 그 사건이 있은 후로 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는 바람에, 주인 없는 분노만 마음 한 구석에 덩어리 져서 나를 갉아 먹고 있었다. 뿌리채 까지 곪아 버린 내가 진아와 닮은 한성지 앞에서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한성지가 내게 다가와서 먼저 말을 걸었을 때는 당황함을 숨기지도 못하고 놀락 기색을 그대로 비추었다. 한성지는 전학 온지 한 달이나 지났고, 같은 반 급우고, 우리 반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뽐내고 있으면서 마치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고개를 멍청하게 끄덕였다. 한성지는 내 책상 위를 슬쩍 보다가 내 앞자리에 착석하며 물었다.
“뭐하고 있었어?”
“...나 공부.”
“교과서도 안 펼쳐 놓고?”
“...나 공부.”
“교과서도 안 펼쳐 놓고?”
...아, 내 얼굴이 군고구마 처럼 뜨겁게 달아 오르는게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책상 밑 서랍안에서 황급히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내 무의미한 분주함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성지가 갑자기 풋, 소리내서 웃었다. 난 웃음 소리에 멍하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성지를 바라 보았다. 눈이 예쁘게 휘어져서 잔잔한 미소를 띄고 있는 그 모습은, 나로 하여금 또 다시 진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얘는 대체 뭐지? 나는 무안함과 복잡한 감정을 감추며 책상 밑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성지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나긋 나긋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내게로 몸을 조금 숙인 성지에게서는 어렴풋한 라일락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너 정말 재밌는 애구나.”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닫게 되는건 먼 훗날이야기다.
-
그때 이후 나는 한성지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모두가 의아해 했지만, 한성지는 그 날 이후 당연한듯 항상 나를 찾기 시작했다. 승관아,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줄곧 예전의 진아를 닮은 그 앳되고 청량한 미소를 내게 지어주었다. 한성지가 나의 어떠한 부분에 끌려서 가까이 지내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반에서, 아니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있을 아이에게 꽤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 당황스럽고, 의아하기도 했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모든걸 억누르며 살고 있는 내 앞에 성지는 굳이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물론 비록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짐작하기 어려울 초등학생이었지만, 성지가 나에게 이성적인 호기심으로 접근한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처음에야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지만, 난 이내 성지의 그 다정함에 차근 차근 적응을 해갔다. 아, 나와 정말 친구가 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다가 와주었구나. 성지는 언제나 착하고, 천사같으니까 나같은 애한테도 손을 내밀어 주는구나. 이런 생각으로 내가 쉽사리+ 풀지 못했던 타인에 대한 경계를 해제 했다. 그리고, 성지와 매일 등하교를 같이 하며 남다른 유대를 쌓아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방아쇠였다. 나는 타인을 경계 하는 척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남들의 관심을 간절히 갈구 하는 어린 아이 였으니까. 나는 더 성지와 가까워 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커져 가기 시작 했을때 즈음,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기다렸다는듯 성지와 나는 다른 반으로 갈렸고, 성지는 이번엔 또 새로운 애들한테 둘러 싸였다. 붙어 있던 반이 갈리자, 전 처럼 성지는 나를 더이상 특별하게 신경 써주지 않았다. 복도에서 만나면 친절한 의례로 인사를 해주는 것이 전부 였다. 함께 했던 등 하교길도 이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성지에게 나는 소외된 아이까지 친절하게 대해주는 선한 이미지를 위해 소비한 수단에 불구 했던 걸까? 이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착한 성지가 나를 더 가여워 하길, 내게 좀 더 신경을 써주길, 나만을 생각 해주길 간절히 바랬고, 그런 엇나간 심리는 또 다시 나를 수렁으로 떨어뜨릴 준비를 시작했다.
성지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한 나는 방과 후에 성지를 불러 내었다. 그리고 조바심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았던 내가 겪었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그 악몽을 장황하게 풀어 놓았다. 진아의 이야기를 이렇게 소비하면 안된다는 큰 외침이 들렸지만, 필사적으로 무시해가며 나를 더 불쌍하고 처량하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성지가 내 쪽으로 마음을 다시 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지는 잠자코 말 없이 내 두서없는 이야기를 경청 해주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는, 성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내가 들려준 이야기가 슬퍼서 지은 표정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썩 유쾌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와서 생각 해보면 그 표정은 묘한 안도감 이었을지도 모른다. 아 얘가 자신의 치부를 이렇게 쉽게 털어 놓는 구나, 얘는 정말 다스리기 쉬운 아이구나. 내가 그런 애를 잘 골라서 선택한거였구나. 그 깨달음을, 아마 처음으로 느꼈을 성지는 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무방비로 방치된 내 손을 꽉 잡았다
“승관아, 왜 그때 그렇게 김지한이라는 애한테 당하고만 있었던 거니. 결국 진아 아버님께도 끝까지 말도 안하고? 그렇게나 무서웠어?”
“...무서웠어,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었어. 난 힘도 약하고, 겁도 많으...”
“그런식으로 합리화 하면 안돼, 승관아. 넌 나한테 혹시 똑같은 상황이 또 발생 한다면 그때도 그렇게 무섭다, 하면서 피하고 도망칠 거니?”
“...무서웠어,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었어. 난 힘도 약하고, 겁도 많으...”
“그런식으로 합리화 하면 안돼, 승관아. 넌 나한테 혹시 똑같은 상황이 또 발생 한다면 그때도 그렇게 무섭다, 하면서 피하고 도망칠 거니?”
역시나 현명한 한성지. 나는 그렇게 말하는 한성지가 처음으로 두렵게 느껴졌다. 단호하게 꾹 다문 입술이 날 강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성지가 진아와 똑같은 상황?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고, 2년 전 그때처럼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듯 했다. 성지는 내 손을 잡은 손에 더욱 더 힘을 주었다. 작은 손이 내 손을 힘줘서 꽉 쥐고 있었다. 잇새로 작은 신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아팠다.
난 새하얗게 질린 나의 손을 보며 한성지를 멍하니 쳐다 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한성지는 쥐고 있던 내 손을 놓으며 자신이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 놓더니, 그리고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손을 들어 내 뺨을 강하게 내리 쳤다. 나는 갑자기 얼굴에 닿는 묵직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뒷걸음 치다가 그대로 주저 앉고 말았다.
아프다. 김지한이 때렸을때는 이 정도로 아프지 않았는데. 나는 오랜만에 맛 보는 누군가에게 맞는 생경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은 너무나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성지가 나를 때리다니, 대체 왜? 손을 들어 부은 듯한 볼을 만지작 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진아 대신 내가 널 때려준거야. 일어나.”
성지는 밑에 내려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다시 들고 내 앞으로 와서 아까 나를 때렸던 그 작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성지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어떻게 상황이 흘러 가는지 알 수 없다. 확실한건 내가 기대했던 상황은 아니라는 것, 난 성지 앞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 그것 뿐이다. 나는 긴장으로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성지의 손을 잡았다. 한여름도 아닌데, 땀은 그칠줄을 몰랐다.
“승관아, 넌 똑같은 실수를 이제 반복하기 싫은거지?”
“...응, 절대.”
“그럼 너는 좀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치?”
“...응, 절대.”
“그럼 너는 좀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겠다. 그치?”
“……”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성지는 언제 그랬냐는듯 따스하게 웃었다. 우리의 관계가 평범함과는 다른 항로를 탔다는 신호였다.
-
난 원하던대로 다시 성지와 가까워졌다. 성지는 예전처럼 틈만 나면 나를 찾았다. 틀어졌던 등 하교길도 다시 맞춰졌다. 다만 달라 진게 있다면, 성지는 이제 내게 썩 친절하지 않다는것. 쓰고 있던 가면을 조금씩 벗는 과정을 걸치는 듯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성지는 바른 생활을 하는 착하고 예쁜 학생이지만, 그건 성지에게는 그냥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겉 이미지일 뿐 이었다. 성지는 나이 답지 않게 성숙했으며, 누구보다 똑똑하고, 주관있고, 강했다. 그러면서도 남을 자신보다 하등하게 대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길들이는걸 취미로 삼는 무서운 면이 공존 하기도 했다. 난 그 모든걸 내 치부를 들어 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성지의 첫번째 타겟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지는 내 정서적 트라우마를 단숨에 간파하고, 나를 자신의 취미에 끌어당기기 위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자신을 진아처럼 투영해서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그럼 모든 이야기는 끝난다. 성지의 입장에서는 나를 조종 하는 것은 누구보다 손쉬운 일이었겠지.
성지는 점점 내게 강해지기를 강요했다.
“승관아, 너 지금 처럼 숨어서 소심하게 살다가는 누구도 못 지켜. 나를 지킬 수도 없어. 좀 더 부딪혀서 누구보다 세져야해.”
난 성지의 입맛대로 길들여지기 좋은 스타일 이었다. 어두운 과거가 있고, 내향적이고, 약한걸 증오하고, 진아를 닮은 여자에게 약하고,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싸우는것. 이 모든 취약점은 내가 성지가 하는 모든 일에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음의 요인이 된 것이다. 성지는 이따금씩 아는 오빠들을 소개 시켜 주겠다며 나를 방과 후에 음침한 곳으로 남들 몰래 데려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보다 키나 덩치가 훨씬 큰 형들 앞에 나를 홀로 세우고, 나로 하여금 싸움을 유도 하게 만들었다.
“넌 중학생이 되면 나를 지켜 줘야 하잖아. 그렇게 약해서는 안돼.”
이 한 마디로 나를 벼랑 끝에 내세웠다. 이상하게 그 달콤한 말을 들으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것만 같았다. 성지가 나를 온전히 믿고 의지 하는 것만 같은 느낌. 성지만은 지켜 줘야 겠다는 의무감, 또 마음 속 깊숙히 묻혀져 있는 진아에 대한 죄책감. 그런 부연의 감정들은 겁쟁이인 나를 어떻게든 극복하고 싸우게 만들었다.
물론 처음에는 맞기만 했다. 나는 싸움에 기술이 없었고, 체구도 작았고, 누가봐도 쉽게 제압이 되는 상대인데다가, 남을 때리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늘 맞아 터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부모님의 어딜 가서 그렇게 다쳐 왔냐는 큰 질책이 이어졌다. 놀다가 넘어졌다는 변명의 효력도 떨어지자, 나에 대한 걱정 대신 잔소리만 하시는 부모님에게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싸웠다고 대들듯 대꾸 해버렸다. 그러자 부모님은 크게 놀라시며 이제 어린게 싸움질까지 하고 다니냐고 더 크게 질책을 하시기 시작했다. 내가 싸움 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순간, 난 부모님한테 싸움질까지 하고 다니는 문제아로 순식간에 낙인 찍혀 버린 것이다. 그걸 깨닫자, 나는 모든 걸 놓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도덕성, 가책, 두려움까지 모두 버리고 성지가 원하는 대로 살자. 그냥 정말 문제아가 되어 버리자. 그런 무서운 다짐을 해버린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 중학교 입학을 해서 내가 광라리 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기 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싸움은 하다 보면 늘기 마련이다. 성지 덕분에 유독 싸움에 누출 되는 경우가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싸움 실력이 기하 급수적으로 상승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지켜야 하는 상대가 있을 때 좀 더 강해진다, 라는 영화 대사 같은 말도 실감이 날 정도 였다.
그 후, 나는 성지는 나와 같은 중학교를 입학 했다. 승관아, 이 학교에서는 너를 아무도 못 건들게 아예 먼저 선수를 쳐버리는게 어때? 중학교 입학실 날 등교길, 성지는 내게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나는 선뜻 그러겠노라 답하지 못하고, 크게 망설여졌다. 중학생 첫단추 부터 엇나가면, 결국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평범한 리듬을 되찾지 못하고 틀어 진다는 건 당연하게 알 수 있는 순리였다. 난 아직 나의 모든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성지가 하라는 대로 주관없이 인형처럼 끌려 다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성지가 원하는 만큼 단단하게 단련 되지는 않았으니까, 난 아직도 어리고, 겁이 많았으니까.
그 후, 나는 성지는 나와 같은 중학교를 입학 했다. 승관아, 이 학교에서는 너를 아무도 못 건들게 아예 먼저 선수를 쳐버리는게 어때? 중학교 입학실 날 등교길, 성지는 내게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나는 선뜻 그러겠노라 답하지 못하고, 크게 망설여졌다. 중학생 첫단추 부터 엇나가면, 결국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평범한 리듬을 되찾지 못하고 틀어 진다는 건 당연하게 알 수 있는 순리였다. 난 아직 나의 모든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성지가 하라는 대로 주관없이 인형처럼 끌려 다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성지가 원하는 만큼 단단하게 단련 되지는 않았으니까, 난 아직도 어리고, 겁이 많았으니까.
“이제 넌 내 남자친구니까 좀 더 강해져야지.”
그런 나를 정확하게 궤뚫어 보듯, 성지가 던진 말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성지를 돌아 보았다. 남지친구? 성지가 나를 떠보려고 하는 말인지, 진심으로 던진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성지의 입에서 나온 남자친구라는 단어에서 오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그 희열감은 내게 더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알겠어.”
아마, 성지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 한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지에게 나는 그저 길들이기 좋은 상대였을 뿐이다. 자신의 취향대로 날 바꾸어 놓고, 나를 통해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탈을 하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성지를 좋아 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성지를 지켜 줘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던게 아주 컸다. 초등학생때부터 꾸준히 성지에게 세뇌 당한 효과였다. 어쩌면, 거기에 성지에 대한 애정이 조그맣게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꺼이 성지의 남자친구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있을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말이다.
성지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입성한 나는 성지의 바람대로 중학교 1학년 초입 부터 싸움을 하고 다녔다. 부모님은 점점 삐딱선을 대놓고 타고 있는 나 때문에 가정교육을 누가 더 잘못했냐는 주제로 매일 싸우기 시작했고, 나는 교무실을 들락날락 거리며 학급을 비롯한 전체에게 완전한 문제아로 낙인이 찍혔다. 중학교 2학년부터는 성지가 담배를 배우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담배와 술을 접했다. 그때부터 내가 싸움이나 나쁜짓을 할때마다 들쑥 날쑥 튀어 나와 나를 이곳 저곳 찌르며 괴롭혔던 내 안의 모난 돌들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맞는것도, 남을 때리는 것도. 성지가 나를 위해 주선한 싸움판에서 이겨도, 져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광라리 라는 기괴한 별명이 붙고, 남들이 내가 걸어만 가도 눈을 깔고 벌벌 기고, 나 같은 문제아랑 사귀면서 오히려 이미지가 더 쇄신되어 학급에서 더욱 인기를 얻어가는 성지를 보면서도 나는 무감각했다. 성지는 나로 인해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걸 충족 시켰다.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욕구... 나는 처음부터 성지가 원했던 대로 단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요즘 재밌는 애를 찾은 것 같아.”
중학교 3학년 초입, 나와 함께 맞담배를 피우고 있던 성지는 누구 보다 즐거워보였다. 가끔가다가 저렇게 활짝 웃는 경우가 있었다. 재미난 놀이감을 발견 했을때, 주로 내가 싸우는걸 보며 동영상을 찍을때 저런 표정을 짓는다. 나는 담배 연기를 빨아 들이며 성지의 표정을 관찰 했다, 썩 좋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성지는 나를 남자친구로 두고 있지만, 연애 상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를 완전히 배제하고 자신이 끌리는 상대에게는 과감하게 들이대는 성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자신의 가녀리고, 예쁜 소녀 이미지를 적절히 이용해 가지고 놀다가, 또 특유의 다정한 척을 하며 잘 포장한 헌신짝 처럼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번에도 그럴거라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촉이 좋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담배꽁초를 짓이기며 물었다.
성지는 나를 남자친구로 두고 있지만, 연애 상대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를 완전히 배제하고 자신이 끌리는 상대에게는 과감하게 들이대는 성향이 있었다. 그렇다고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냥 자신의 가녀리고, 예쁜 소녀 이미지를 적절히 이용해 가지고 놀다가, 또 특유의 다정한 척을 하며 잘 포장한 헌신짝 처럼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번에도 그럴거라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촉이 좋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담배꽁초를 짓이기며 물었다.
“...누군데?”
“정도중에 김민규.”
“정도중에 김민규.”
잘하면, 승관아. 너 나랑 헤어져야 할 수도 있겠다. 얘가 엄청 흥미롭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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