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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나는 꽤 오랫동안 진아를 만날 수 없었다. 아니, 만나는걸 피했다고 보는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진아를 그 앞에서 그런식으로 취급 했는데, 무슨 낯짝으로 진아를 만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은 나를 더 극한으로 밀어 넣었다. 매일 밤 꿈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진아가 등장했다. 패턴은 언제나 동일했다. 처음 시작은 상가 옥상에서 바람을 등지고 있는 진아의 어렴풋한 미소를 띈 얼굴이 보인다. 내가 그 미소에 홀려서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진아는 그때를 기다렸다는듯 연기가 되어 차츰 희미해진다. 내가 그 모습을 낙담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 뒤에서 검고 큰 손이 나타나 내 뒷덜미를 세게 잡아당기고,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그 날, 나의 악몽의 시작점으로 빠르게 바뀌어져 간다.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며 나타난 그 날의 방과 후. 김지한은 현실에서 그랬던것 보다 활씬 더 험상궃은 얼굴로 나를 향해 웃고 있고, 내가 멍한 상태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면... 아까 연기가 되어 사라진 진아가 처음 만났을때의 그 우스꽝 옷차림으로 내 앞에 오두커니 서 있는것이 보인다. 그럼 나는 아까와는 다르게 진아에게 쉽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 부분은 내가 얼마나, 얼마나 나쁜 새끼인지 단편적으로 뉘우칠 수 있게 만든다. 꿈에서 조차 진아에 대해서 어떠한 부끄러움이 든다는 증거를 보여주니까. 그렇기 때문에 현실보다 더 회화된 진아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고, 나는 그걸 외면하려고 필사적으로 고갤 돌려버린다.
“뭐해, 부승관. 꺼지라고 한 마디 해줘.”
“......”
“네가 꺼지라고 말 안하면 쟤 계속 길 막하고 서있겠는데.”
김지한이 음산하게 속삭이고, 진아는 움직임 없이 나를 그저 보고 있다. 나는 디케 앞에 심판을 받는 죄인이 되어 답이 정해져 있는, 그 절망적인 고민과 고난의 순간을 삽시간 겪는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떼려는 순간이 오면,
잠에서 깬다. 그럼 나는 침대보를 적실 정도로 크게 울어 버린다. 엄마가 놀라서 달려 올때까지.
정확히 그날을 겪고 난 뒤부터 내 성격은 차츰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날의 나의 과오가, 모두 내가 약하고 비겁하기 때문 이었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약해서 내가 차마 방어 해낼 수 없었던 모든 순간들이 그냥 그대로 코 박고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다. 그 사건이 그 당시 어렸던 나에게 정서적으로 큰 자극을 준건 분명했다. 지금 내가 꽤나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 것도 이 트라우마가 가져다 준, 어찌보면 지당한 결과였다. 마냥 진아만을 생각 하며 김지한 무리들 사이에서 혹여 눈에 띌까 조용히 숨을 죽이고 살던 쥐새끼 같던 시간은 결국 운명처럼 저물었다. 나는 죄책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진아를 하루라도 빨리 잊기 위해서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았다. 물론 김지한 만큼은 되지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강할 수 있었을리 없다. 나를 덮고 있는 만약 김지한 말이라면 순종 하기에만 바빴던 찌질하고 암울한 본능의 거품을 아직은 살짝 걷어냈을 뿐이었다. 김지한은 조금씩 자신의 말에 반항을 하기 시작하는 나를 흥미롭게 바라 보았다. 외로운 늑대형 스타일인 김지한은 결코 그런 나를 수면 위에서 자극 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 이제 그렇게 하는 방식으로는 나를 완전히 지배 하기는 힘들거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한 걸지도 몰랐다. 김지한이 남들보다 영악하고 똑똑 하다는건 인정한다. 진아와 더불어 내 온전하지 않은 인격체 형성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것도 인정한다. 내 인생은 꼭 아무도 찾지 않을 황량하고 피페한 전개의 드라마 처럼 굴곡 있게 흘러간다. 모두의 인생이 그런걸까, 아니면 나만이 특별한 것일까.
“…아, 저기 승관아!”
그날은 방과 후 였다. 요즘 나랑 방과후에도 잘 조우를 하지 않는 김지한이 모처럼 자신의 집으로 불렀지만, 나는 학원 수업이 앞당겨졌다는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김지한은 나를 물끄럼, 바라 보기만 하고 의외로 순순히 보내 주었다. 나는 일부러 김지한 보다 느리게 가방을 싸고 비척비척 거리며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휴대폰을 바라 보며 교문을 빠져 나가려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자동처럼 뚝 멈췄다. 교문 앞에 구부정하게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은 진아의 아버지 였다. 나는 단숨에 잠시 잊고 있었던 진아에 대한 생각이 물감이 캔버스에 번지듯 빠르게 적셔 오는게 느껴졌다. 좋지 않은 감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인사를 하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무미건조하고, 매끄럽지 못했다. 진아의 아버지는 내게 가까이 다가 왔다. 키가 크신 편 이었지만, 자세가 구부정하고, 덩치가 왜소 하셔서 유독 작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진아의 아버지를 보자 또 다시 가슴 한구석이 따끔따금 저려왔다. 진아의 아버지는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검게 탄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진아한테 물어도 네 안부를 알 수가 없더구나.”
나는 대답 대신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그는 웃고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마치 연극 배우가 그러하듯, 단숨에 슬픈 표정으로 변해가는 주름 가득한 그의 얼굴이 더더욱 하염없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 모양을 두렵게 쳐다 보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한참을 일그러진 얼굴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던 그가 결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혹시, 혹시 승관아. 너는 최근에 진아를 괴롭히는 애가 누군지 아니?”
“…네?”
“최근에 얼굴에 상처 한 두개 씩 달고 오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넘어 졌다고만 하고... 그래, 나도 무심하지. 나는 세상에, 또 그걸 믿고 있었다. 칠칠지 못하게 돌아 다니지 말라고만 말했지. 그런데 어제는...”
아저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것에 주의를 돌릴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이 놀이기구처럼 어지럽게 핑핑 돌기 시작했다.
“...진아가...진아가, 흐...흑....상가 옥상에서 떨어졌어. 2층 난간으로 떨어져서, 다행히 목숨은 지장이 없어, 근데...”
“……”
“건너편 정육점 사장님이 잠깐 봤는데, 그날 옥상에 진아말고 또 누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그 애가 진아를 민 것 같다고...”
말을 힘겹게 힘겹게 이어가던 그는 결국 주저 앉았다. 눈에서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몸을 부들 부들 떨며 울고 있는 한 아버지의 절규를 내 두 눈 으로 담았다. 진아, 얼굴에 상처, 상가, 옥상, 진아를 옥상에서 민 애...모든 단어들이 회오리쳤다.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내가 겪고 있는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했다. 무어라 감히 말을 꺼낼 수도 없는 그 와중에 내 머리를 강타하는 이름이 있었다.
김지한.
최근 들어 방과 후에도 나를 잘 부르지 않고 무리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혼자 하교하고는 했다. 그 사실이 왜 지금 생각 났는지는 모르겠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지만, 특별히 엄청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김지한이 그동안 나도 모르게 진아를 괴롭혔던거라면, 진아를 민게 정말 김지한이라면, 난...
“네가 아니라는건 알고 있다... 정육점 사장님도 네 얼굴은 아니까.. 이 학교 다니는 애는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진아를 괴롭힌 누군지 자격없는 애비놈은 알 수가 없구나.”
나는...어떡하지?
목구멍 앞까지 김지한이라는 이름이 맴돌았다. 과연 김지한이 한 일이 맞을까? 설마 그렇게 까지 했을까... 라는 의구심이 마음 속 빈 공간을 채우면서도 서늘한 예감의 화살표는 자꾸 그 쪽을 가르키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아 부끄러옴과 어른의 체면도 내려놓고 아이처럼 울고 계시는 진아의 아버지를 내려 보았다. 저 모습에 힘이 되어 드리고 싶다, 진아가 걱정된다, 진아가 보고 싶다, 진아 있는 곳으로 뛰어 가고 싶다. 어느 병원에 입원한걸까? 많이 다쳤을까? 의식은 있는걸까? 넘쳐나는 진아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관자놀이가 지끈하게 아파 오더니, 눈가가 아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야가 뿌얘지면서 나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갑자기 흘러 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아, 이 눈물의 의미를 잘 안다.
“…죄송해요, 아저씨. 저도,”
저도 모르겠어요.
또 진아와 나를 저울에다가 올려두고, 고심끝에 나를 택하는 짓을 반복 하고 있다. 내 뻔뻔한 입술에서는 여전히 마음과는 다른 말이 튀어 나온다. 나는 아직도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나를 벌 하듯, 눈물은 쉬지 않고 떨어졌다. 나는 우는 소리를 참으려 깨물었던 입술을 자유롭게 놓았다. 마치 짐승같은 울음소리가 깊은 곳에서 비집고 올라왔다. 심장이 쿵쾅쿵쾅, 귀에도 들릴만큼 거세게 뛰었다. 아저씨가 듣진 않으실까 조마조마 하기 까지 했다. 다행히 아저씨는 이미 흥건해진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으시며 일어나셨다. 나는 그 앞에서 멈추지 않는 눈물만 내보이며 고개만 하염없이 젓고 있을 뿐이었다.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입에서는 자동적으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때려서라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도록 막고 싶었다. 뭐가 죄송하지? 내가 합리적으로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는걸 감추지 않고 말을 한다면 죄송할 일은 없을텐데, 나는 무엇때문에 또 함구하고, 도망치고...
진아의 눈을 닮은 아저씨의 눈에는 슬픈체념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내 입은 멈췄다. 나는 아저씨가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고, 힘없이 걸어 가시며 그 자리를 벗어 나실 때까지 어떠한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강한 쇳덩어리로 만든 줄이 내 온 몸을 결박하고 있는 듯 했다.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풀었다. 나는 내가 조금은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지난 날, 진아에게 몹쓸짓을 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괴로워 했던가. 그런 내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그러면서도 내심 한 번 더 그런 일이 반복 된다면 다시는, 다시는 진아를 부정하려 들거나, 맞서지 않은 채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간의 그 고통의 시간들은 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였다는걸, 지금 한 번 더 똑같은 과오를 범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악질적인 방관자. 나는 아까 진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쌓아 놓은 모래성이 바닷물에 무너지듯 폭삭 주저 앉았다. 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하는건 두려움이었다. 사람이 약하다는 건 생각보다 더 비참하고 인생 자체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확고한 관념이 가져다 주는 막연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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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관아, 밥 먹으러 가자.”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친구 녀석이 내 손을 잡아 이끌었지만, 나는 저 멀리서 친구들과 웃고있는 김지한을 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오늘 학교에 오면 꼭 물어 볼거라고 다짐했었다. 진아한테 그런게 너냐고, 네가 진아를 떠밀었냐고. 그렇게 마음을 잡으며 학교를 왔는데, 나는 4교시가 마치는 순간까지 말 한 마디도 떼지 못했다. 그게 너무 분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학습 능력이 미달 돼도 되는 걸까. 나는 몇 번이고 저질러 놓고 후회하고, 자학하고, 그 모든걸 회피 하고, 다시는 안 그럴거다 다짐하고, 와도 그냥 제자리로 돌아 온다. 트라이앵글 처럼 세 꼭지점만 빙빙 돈다. 결국 나에게 있어서 발전이란 없다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약하고, 소심하고, 쉽게 꺾이고...
친구의 손길에 휩쓸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 났을때, 순간 운명처럼 김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김지한은 나를 쳐다 보았다. 나도 홀린듯 그 녀석을 바라보았고, 녀석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득의 양양한 표정. 나는 머릿속에서 끊어져 있던 어느 회로선이 갑자기 연결 된듯한, 엄청난 스파크가 튀는게 느껴졌다. 내가 한 번도 느껴본적 없는 생소한 감각 이었다. 나는 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김지한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 갔다. 심장이 요동쳤다.
“김지한. 네가 그랬어?”
“뭘?”
“진아 옥상에서 민거 그거 네가 그랬냐고.”
김지한은 자신의 팔짱을 끼더니,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초등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악함이 보였다. 소름이 끼치려고 했다.
“너도 알다시피 걔 친구 없잖아? 내가 불쌍해서 최근에 좀 놀아 줬지. 내가 옥상에서 밀었냐고? 아니. 걔가 그냥 떨어진거야. 걔는 되게 단순해서 조금만 자극해도 그러더라? 되바라ㅈ...”
순간 내 주먹이 반사적으로 녀석이 말하고 있는 입을 향해 날라갔다. 퍽, 소리와 함께 김지한은 바닥에 뒹굴었다. 뭐야? 애들의 웅성 거리는 소리가 점진적으로 커졌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내 주먹을 한 번 쳐다 보았다. 조금 생소한 감각 이었다.
아, 사람을 때리는 건 이렇게도 쉬운 일 이구나. 이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내가 생각할 틈도 없이 김지한이 벌떡 일어나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나 역시도 아까 김지한이 그랬던 것 처럼 바닥에서 꺼졌다. 나는 얼얼한 볼을 한 번 매만졌다.
아, 맞는 것도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구나. 이것도 진작에 알았더라면.
내가 무서워 했던 것은 알고 보면 별거 아니라는걸 진작 알았더라면, 내가 진아를 내 인생에서 잃게 될 일은 없었을텐데.
성이 풀리지 않은 김지한이 내게 주먹을 몇 대 더 날렸지만, 나는 몸을 새우 처럼 구부리고 맞고만 있었다. 선생님이 경악을 하며 뛰어 올때까지. 이상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더 아프고, 눈물이 났다. 이런 별거 아닌 상황이 두려워서 난 지켜 내지 못한 많은 순간들을 평생 후회하게 될테니까.
-
그 낡고 허름한 상가에서, 유일하게 오랫동안 터줏대감 노릇을 하며 장사를 이어가던 진아세탁소는 그 사건이 지나지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엄마는 세탁소 사장님집 딸이 몸이 안 좋아지게 돼서 장사를 접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들은 나는 모처럼 상가 앞을 지나가는 하교길을 선택했다. 그동안은 죄책감과 이런 저런 나만의 고난 때문에 이 앞을 감히 지나가지 못했다. 저 앞에 상가가 보이자, 나는 걸음을 천천히 멈추었다. 정겨운 파란색의 진아세탁소 간판은 이미 떨어진 후 였다. 상가 앞에 하얀 봉고 트럭이 세워져있었다. 그 앞에는 크고 작은 짐들이 나란히 실어져 있는게 보였다. 끈으로 단단히 고정 해놓은 작고 익숙한 냉장고를 보자, 이내 그것이 진아네 이삿짐이라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이사를 가는구나. 나는 멍하니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시동이 켜져 있는 트럭의 근처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아가 이 동네는 더이상 있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맘고생 많으시겠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물어도, 혼자서 놀다가 그랬다고만, 그 말만 반복 하네요.”
진아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나는 트럭 뒤에 쪼그려 앉아 몸을 숨겼다. 진아 아버지의 한숨 소리는 내가 있는 공간까지 깊이 들어 오는듯 했다. 발자국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가, 이내 트럭안에 묵직한 것이 실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책가방을 앞으로 껴안고 지퍼를 열었다. 한 번도 가방 안에서 뺀 적 없었던 교과서들을 꺼냈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냉장고와 서랍사이에 있는 작은 틈으로 팔을 뻗어 교과서들을 하나하나 끼워 넣었다. 그리고 두어 걸음 물러나 상가의 옥상을 바라 보았다. 승관아! 날 부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던 진아를 떠올리며. 나는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며 작은 목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미안해, 진아야”
안녕, 진아야.
-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안녕, 이름이 승관이었지. 난 한성지야. 한 달 전에 전학왔어.”
절묘하게도 그 시절에 또 다시 내 앞에 나타났던건 나이답게 밝고 무구한 미소를 가진 참 예쁜 소녀였다. 평생 계속 될 것 같은 죄책감을 안고 죄인으로 살아 왔던 짧은 시간이 저물고, 새로운 여명이 떠오르는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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